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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노와영화 리뷰에서 ★★1/2 이하의 별점을 받는 특별한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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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노 작성일09-02-13 16:18 조회4,4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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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방문자들께 바노와영화 리뷰에서 ★★1/2 이하의 별점을 받는 비결 10가지를 고백합니다. 개인적인 소신에 따라 적은 글이므로 자신의 가치 기준과 맞지 않다고 하여 험한 의견을 남기는 일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참고: 순서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도와 관련이 없습니다.
 

1. 배우와 감독의 오버.

영화 <고스트 월드>에서 주인공 이니드(도라 버치)가 동내에서 희귀 레코드를 판매하는 시모어(스티브 부세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는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그녀는 단지 이상한 느낌을 주는 시모어에게 관심이 있지만 괜히 다른 물건이나 레코드를 만지작거리면서 인도에서 출간한 거나 다른 옛날 판을 판매하는지 어색하게 물어봅니다. 이니드 옆에 서 있던 친구 레베카(스칼렛 요한슨)는 흥미 없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죠. 시모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소녀들의 장난기와 호기심이 잘 나타난 장면이었습니다. 판매자로서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표정을 관리하는 시모어의 모습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하는 선화(성현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며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헌준(김태우)의 표정이나, 중국식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모델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본 문호(유지태)가 카메라가 돌아간 이후 종업원과 주인의 속닥거리는 장면을 미소 지으며 유심히 바라보는 모습 등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존재하는 마음 속 언어로 표현되는 감정들입니다. 이를테면, 걱정, 근심, 즐거움 혹은 슬픔, 호기심, 장난기 같은 것들이죠. 영화에선 이런 감정들을 몇 번의 대사로 설명해서 만족할 만큼 표현할 수 없기에 종종 인물의 행동이나 표정, 그 이후의 말투 등을 통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저급한 영화를 보다 보면 전혀 절제가 안 되는 인물들이 등장하곤 하는데요. 만나자마자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바로 험한 말이나 행동이 오가는 대부분의 홍콩 영화들이 그렇고, 거리에서 또는 학교에서 한눈에 반한 이성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며 접근하는 우리나라 티비 드라마나 하이틴 영화들이 그렇습니다. 그 안에서 배우들은 실제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을 마치 즐기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방세를 빨리 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의 아줌마는 오버하는 인물의 전형적인 유형입니다. <라이어>에서 손현주나 공형진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아니 그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따라 하기 낯 뜨거운 오버 연기를 펼칩니다.

배우들이 절제를 하지 못하고 오버를 밥 먹듯이 할 때에는 그만큼 영화를 이끌어가는 감독의 오버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감독의 오버는 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나 그 이후의 코멘트에서 자주 드러나는데요. 이를테면 모 영화시상식장에서 자기를 호명하지도 않았는데 무대로 올라가 두리번거렸던 김지운 감독이나, 해외에서 수상하고 돌아온 김기덕 감독이 자기 영화를 헐뜯는 관객과 평론가들을 싸잡아 무시하는 발언을 했던 것들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것과 영화에 별점을 낮게 주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건 '진정성'의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인권 관련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 감독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인권을 걱정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쉽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감독이 민주노동당에 가입되어 있다고 해서, 혹은 이라크 파병을 공개적으로 반대한다고 해서 그가 진정한 진보주의자일까요? 그렇게 판단하려면 적어도 여태까지 만들었던 작품이나 그동안의 언행을 참고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곧 진정성입니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가 힘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오래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해왔던 프로그램을 완성하면서 설득력 있게 화면들을 구성한 그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화당 출신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화씨 9/11>을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죠. 그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을까요? 다른 관점으로, 평소에 오버하고 다닌 감독이,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춤을 추고, 화려하고 떠들썩하게 자신을 자랑하고 다녔던 감독이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나 슬픈 멜로드라마를 만들었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기는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감독의 본래 성향과 겉으로 드러나는 작품의 주제가 다르게 느껴질 때 관객들이 그 작품을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런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상식에선 좀 어긋나는 행동이죠.


2. 정치,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경우. 혹은, 기회주의적인 경우.

저는 과거 로마의 영과 화를 다룬 수많은 할리우드 작품들이 왜 모두 영어로 되어 있는지 어릴 때부터 의문이었습니다. 아! 미국 영화니까 영어로 되어 있다구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에서 만약 이토 히로부미 관련 영화를 만든다고 해보죠.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가 대사를 모두 한국말로 하고 영화 전체에 일어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말이죠. 일본에서 이순신 관련 영화를 만드는데 이순신이 우리말을 안 쓰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발음해보세요. 중국에서 링컨 영화를 만드는데 링컨이 영어를 안 쓰고 중국어를 한다면 아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을 겁니다. 이건 영어가 세계 공용어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언어는 곧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라스트 사무라이>나 <데루스 우잘라>, 하다못해 <황산벌>에서도 사실적 언어는 지켜집니다. 그러나 매우 거만한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자신들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 로마 관련 영화들을 모두 영어로 도배해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영화도 있습니다. 1950~80년대까지 만들어진 대부분의 우리나라 반공 영화들이 그랬습니다. 독재에 항거한 역사도 매우 짧은 부끄러운 역사를 보유한 한국영화는 다른 대중예술인 한국의 음악이 미흡하나마 희생을 감수해가며 바른 소리를 해 왔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금지곡이 되거나 잡혀가는 일이 있었어도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1970, 80년대 우리 음악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독재에 항거하다 잡혀가 감옥에서 영화를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터키 감독 일마즈 귀니의 <욜>이 칸에서 대상을 수상할 때 한국의 어느 감독도 그 현상이 보여주는 예술가의 열정과 자유에의 의지를 읽어내고 우리가 그러하지 못했던 현실을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엉터리 액션물과 하이틴물로, 80년대는 넘쳐나는 에로물로 그렇게 하루하루 기생하는 감독들이 판을 쳤습니다.

정치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주제들에 대한 시선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남북 평화 무드가 완성돼가고 있던 시점에 만들어진 2000년도의 <공동경비구역 JSA>는 해방되기 전엔 쥐죽은 듯 숨어 있다가 해방이 선포되고 나서야 태극기 휘날리며 거리로 나온 사람을 연상케 합니다. 그것도 박찬욱 감독이 작품의 일관성을 깨면서까지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아쉽게 느껴졌었죠.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 역시 꽤 늦게 만들어진 시대착오적 영화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자신이 데뷔할 때 <실미도> 같은 영화를 만들었어야 합니다. <이중간첩>, <간첩 리철진> 등 안전한 시대를 골라서 선택된 수많은 정치 영화들은 그래서 비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영화의 사례를 보면 좀 노골적인 것들이 많은데요. <블랙 호크 다운>에서 소말리아 사람들은 그냥 좀비였습니다. 미군 몇 명을 구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수많은 좀비를 총으로 냅다 갈기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아마 리들리 스콧에게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피터 위어의 <마스터 앤 커맨더>는 소말리아인 대신에 프랑스 해군이 유령으로 그려졌습니다. 인간도 아닌 유령을 상대로 싸우자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도 끝내 이기더군요.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는 일본인들을 멍청이들로 표현했고, 제목도 기억 안 나는 몇몇 영화에서 한국인들은 벅벅거리며 말도 잘 못하면서 돈에만 눈이 먼 사람들로 나왔습니다. 화나는 일이죠.

1950년대 매카시 선풍이 불던 미국에서 앨리아 카잔은 가장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감독으로 유명한데요.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그 순수성을 의심받습니다. 왜 앨리아 카잔은 시간이 흐르면서 죽고, 채플린은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남게 되었을까요? 영화뿐 아니라 어느 작품이건 그것을 순수하게 텍스트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서정주가 아무리 뛰어난 시를 남겼다고 해도, 김기창이 아무리 뛰어난 그림을 그렸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 작가의 올바른 의식이 사라진 쓰레기 더미일 뿐인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탈자연적이고 권위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이미 영화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비평의 한 방식이 되어버린 페미니즘은 단순한 여성의 차원을 넘어서 관습화되고 규범화되어 버린 이 시대의 모든 관념들에 대한 거부운동으로 확장되어야만 합니다. 티비 드라마는 뿌리 깊게 내려오는 관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인데, 이를테면 남녀 주인공이 결혼하는데 항상 갈등을 일으키는 결혼 반대의 목소리는 남자 측 어머니가 맡습니다. 여자 측 어머니는 거의 항상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굽실거리며, 남자 측 아버지는 마치 모든 등장인물의 큰 어른이나 되듯이 항상 모든 사태를 관망하다 몇 마디 말로 상황을 정리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때로 자신의 아내를 야단치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결혼에 대한 자신과 확신이 없는 여자주인공을 설득하는 건 항상 자신이 넘치는 재벌 2세 남자주인공의 몫입니다. 여자주인공은 거의 수동적이며 남자주인공은 가끔 그런 여자를 놀려주기도 하면서 여유를 부리는 스타일 좋은 인물로 나옵니다. 왜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 갈등이 증폭돼서 소리를 지르는 인물들이 등장하죠? 유심히 보세요. 십중팔구는 여자입니다. 여자는 그렇게 소리나 지르고 비합리적이며, 방해나 놓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마지못해 따라오는 그런 캐릭터로 나와야 작가나 연출자나 시청자는 안심이 되는 모양입니다. 


3. 낡은 수법에의 의존.

낡은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는 격투를 벌이던 김 선생(백윤식)이 경찰이 쏜 총을 맞아 죽는 장면이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터널 앞에서 박현규(박해일 역)를 때리는 두만 형사(송강호)의 모습이 있죠. <지구를 지켜라>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는 김형사(이주현)와 병구(신하균)가 맞닥뜨리는 곳이 있구요. 이들 장면의 공통점은? 네, 그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스프링클러가 비 역할을 했죠. 이들 영화는 모두 같은 제작자의 작품이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까지 끌어오게 되면 이렇게 비 오는 곳에서의 격투 장면이 갖는 정형화된 틀을 의식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제 관객들은 영화에서 격투를 하는 장면이 나오면 무조건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져야 영화적 맛이 나는, 그리고 인물들의 옷이 흥건하게 젖어야 액션다운 액션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던 상환(류승범)은 아름다운 배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흰 눈 위에 핏자국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레미아 11장의 성경 구절을 자막으로 올립니다. 아주 낡은 장면들이죠. 이런 건 마치 할리우드 영화들 중 빌딩 엘리베이터나 오페라하우스에서 살인이 벌어진다거나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벌어지는 총격전 등과 비슷한 낯간지러운 수법입니다. 홍콩영화로 치자면 주인공이 죽을 때 슬로비디오를 틀어 놓은 것처럼 천천히 쓰러지는 모습을 볼 때의 느낌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한때 그런 장면에 무한한 감동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선했고 새로운 기법이라 여겨졌죠. 하지만, 시간은 흘렀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가운데 액션이 벌어져도 주인공들의 처절함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비장한 음악 없이도 어떻게 하면 원하는 효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매 장이 시작될 때마다 소제목을 붙이는 것(<박하사탕>), 어느 영화에나 꼭 한 번씩 습관적으로 들어가는 남녀 주인공의 정사씬(심지어 바노와영화에서 높게 평가하는 <미소>나 <거미숲>같은 영화에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낡은 틀을 깨려는 의지가 부족한 영화들은 언뜻 봐도 눈에 띌 정도로 곳곳에 뻔한 장치들을 섞어 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주요 세트의 벽지나 바닥 카펫을 기묘한 문양으로 만들어 촬영한 영화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제 그것들도 거울 앞에 선 주인공이 세수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 그 뒤로 귀신이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상투적이라는 인식을 해야 할 때입니다.


4. 유행에 충실하기 혹은 상업성.

최근에 귀여니의 소설이 잇달아 영화화되고 있죠. 돈이 되고 화제가 될 만한 거리를 찾아서 동분서주하는 영화 기획자님들의 노고가 눈에 보이네요. 호러물들도 유난히 많이 나옵니다.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아이디어만 있다면 효과적으로 흥행을 보장받는 호러라는 장르가 여름철 장사로는 제격이기 때문이죠. 누드 열풍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수들의 배우 겸업도 자주 얘기되는 현상들인데요. 이런 유행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한 것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돈을 좀 벌어보려고 하는 작품들은 절대로 다수 관객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단 파격적이거나 지나치게 우울한 내용은 담아서는 안 됩니다. 논란거리가 될 만한 소지를 없애는 대신 철저하게 재미 위주로 가야합니다. 최근에 인기를 끄는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고, 최근에 유행하는 소재를 발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큰 화젯거리였다면, 적당한 배우들을 골라 적당한 시나리오로 그 내용을 다루는 거죠. 물론 그 자체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인정합니다. 어차피 이익을 남겨야 하는 자본이 들어가는 것인데 관객들이 전혀 무관심한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겠죠.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들 하니까요. 하지만, 단순한 반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영화가 유행에 지나치게 충실할 경우 오래 살아남는 작품이 되기는 매우 힘든 법입니다.

미술가는 자신의 감정과 상상력으로 작품을 표현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을 것을 전제로 하고 만들어집니다. 어느 작품이건 혼자서 즐기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조금이라도 남들과 다른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에 힘을 기울입니다. 유행과는 반대의 길에 서서 아름다움을 선도합니다. 가수이자 뛰어난 화가이기도 한 조영남이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요. "가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를 흉내 내어 부르면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화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면 최하의 대우를 받는다." 영화는 어떤 면에선 미술품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유행에 관계없이 시대를 이끌어 가고 새로운 관객 층을 형성하는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독립영화나 인디영화에만 요구되는 게 아닙니다. 역사에 오래 기억되는 상업영화들은 모두 이런 역할을 해온 것입니다. 유행만을 쫓아 돈벌이에 안달이 나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들, 그런 것들에 좋은 별점이 붙여질 리 없습니다.


5. 화려한 비주얼.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은 키도 우마 서먼의 복수 열전을 다룬 영화입니다. 키도는 일본과 중국을 돌아다니며 무도의 고수들에게 한 수 배우며 복수를 위해 몸을 단련하는데, 청엽정 장면도 그렇지만 그녀의 모든 액션은 사실 과거 무협영화의 주인공들을 다시 스크린으로 모셔 오려는 영화광 감독의 애정이 느껴졌을 뿐, 그것 자체로 화려하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길게 들어간 애니메이션 부분 역시 일본 아니메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을 뿐, 어떤 대단히 미학적이거나 화려한 화면 연출이 필요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그런데 <영웅>같은 영화를 보면 장예모가 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감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연걸, 장만옥, 양조위가 스크린에서 펼치는 화려한 액션은 과거 무협영화에서 마음을 설레게 했던 흥미진진한 몸짓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 영화에서의 무술 동작은 일반적인 시각효과 영화들 이상으로 그려집니다. 이 인물들은 일종의 수퍼맨과 원더우먼이라고 할까요? 인간이라기보단 외계인들처럼 보였습니다. 타란티노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시아의 무협 장면을 끌어와 매혹적인 영화를 연출한 반면에, 장예모를 비롯한 대작을 선호하는 중국의 감독들은 더 이상 인간 세상엔 관심이 없는 듯 힘과 기교가 넘치는 외계인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동양인의 역사와 옷을 입혀 놓으니 참 이상한 짓이 아닐 수 없죠.

<올드보이>에도 멋을 부리기 위한 현란한 카메라 워크가 눈에 보입니다. 이 작품을 포함해 <스내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큐브> 시리즈, <투발루>, <미녀 삼총사> 류의 영화들은 역시 과잉 비주얼로 도배를 한 영화들입니다. 계속 반복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감독이나 제작자들은 흔히 내용으로 내세울 만한 게 없을 때 비주얼을 강조하게 됩니다.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원초적인 게 시각이라고 했죠? 그들은 시각을 잡으면 다른 것은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영화가 말이 되지 않아도 보여주는 게 많으면 웃고 울고 신나게 즐기다가 내용상의 허술한 부분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실제로 영화를 보며 왜 이야기가 저렇게 흘러가는지 굳이 따지려 하지 않는 관객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버수스>라는 일본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왜'를 따지는 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느꼈을 겁니다. 이 영화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다 끝납니다. 이유를 묻지 말고 그냥 보면 됩니다. 한나절 동안 일어나는 일인데 인물들은 지치지도 않고 싸웁니다. 왜 지치지 않을까요? 생각하지 마시라니까요. -.-;; 반면 <버수스>를 만든 키타무라 류헤이와 비슷한 류의 마니아를 거느린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만든 <이치 더 킬러>는 사정이 조금 다른 영화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킬러, 카키하라(아사노 타다노부)의 각종 엽기적인 행동을 보여주면서도 또 한명의 자폐아적인 킬러 이치(오모리 나오)와 상대할 때 두려움에 떨며 도망 다니는 그의 모습은 꽤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과정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두려움, 즉 '공포'입니다. 미이케 다카시는 단순히 엽기적인 취향이 있는 스타일리스트로 보이지만 나름대로 의식이 뚜렷한 감독인 거죠. 그의 몇몇 영화가 문제 있지만 그래도 미이케 다카시는 찬성해도 키타무라 류헤이는 반대하며, 첸 카이거는 찬성하나 장예모는 반대하고, 쿠엔틴 타란티노는 찬성해도 박찬욱은 마냥 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말이죠.


6. 머리 나쁜 캐릭터들.

이 조건에는 아마 대부분의 한국영화가 해당할 겁니다. <장화, 홍련>을 보면 지독하게 어리석은 아버지(김갑수)가 등장하는데요. 세상에 아픈 애를 집에 데려왔는데 집이 귀신의 집처럼 생겼습니다. 제가 수미(임수정)의 아버지라면 우선 집 분위기부터 환하게 바꾸겠습니다. 정원에 아름다운 꽃도 많이 심고 집안에 벽지도 모두 환하게 할 겁니다. 티비도 틀어놓고 자주 음악도 듣게 하겠습니다. 식사는 이웃들과 자주하고, 종종 물놀이도 가겠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런 아버지가 없습니다. 정상인이 살아도 금방 미쳐버릴 것 같은 집으로 아이를 밀어 넣고 뭘 바랬던 것인지...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 탈영병 보세요.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강동원이 연기한 희철이의 가족들은 모두 머리가 나빠도 보통 나쁜 게 아닙니다.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흑운(정두홍)은 그만한 실력으로 원하는 것도 못 이루다니 바보 아닙니까? 거의 겨룰만한 상대가 없었는데도 그 꼴이면 좀 한심하지 않나요? <범죄의 재구성>에선 터널 안에서 창혁(박신양)을 뒤따라온 경찰들은 정말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어리석죠. 물론 할리우드 영화에도 이런 경우는 많습니다. <슈렉2>에서 챠밍 왕자와 그 무리의 행동을 보면 차라리 영화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설명해 주고 싶어질 정도로 답답했으니까요. 하물며 다른 우리나라 코미디물은 어떨까요? 머리 나쁜 캐릭터들이 들끓어서 좀 불쌍해 보일 지경입니다.


7. 연기와 연출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우.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화라고 보기 어려운 영화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밝힌 적이 있는데 바노와영화에서는 별점에서 꽝이나 1/2을 주는 경우가 없습니다. 최하 점수가 별 한 개죠. 아무리 못 만든 작품이라도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이고 작업하며 수고한 점은 분명히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미리 최악의 영화라고 생각되는 것은 아예 보지 않으니 그런 별점이 나올 리도 없겠지요. 좋은 작품일 거라고 예상하고 봤는데 어쩌다 하나씩 졸작이 걸리면 참 운이 없는 거죠. 아마 거의 공감하실 것 같은데요. 비디오 가게에 가면 제목을 보자마자 웃겨서 뒤집히는 바로 그런 3류 에로물들은 거의 연기와 연출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우에 해당할 겁니다. 이것들은 좋아하는 층이 물밑에서 항상 존재한다는 점에선 가히 컬트라 부를 수 있습니다.

다수의 텔레비전 드라마들은 연출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상황이 억지스럽고 과장되어 있는 이 영화들은 거의 연기와 연출뿐만 아니라 두루두루 단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7번은 1~10번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죠. 그렇지 않고 다른 특별한 결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1/2 이하라면 거의 7번의 경우로 보시면 됩니다. 대부분의 단편 영화들 역시 여기에 속합니다. 연출력과 연기가 미숙한 실험적 작품들 말입니다. 말로는 참 그럴싸하게 포장을 잘하죠.


8. 주인공에게 유리한 세계.

자~ 점점 재미있어 지지 않으시나요? 다시,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범작을 보죠. 거기서 잭 스페로우(쟈니 뎁)는 무인도에 홀로 남게 되거나 처형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아주 성격 참 느긋한 캐릭터로 나옵니다.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손톱만큼도 없는 이른바 수퍼맨입니다. 이미 스토리가 주인공인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보사 선장(제프리 러시)이 아무리 해골로 변하고 칼질을 잘해도 그는 이미 패배해야만 하는 운명을 시나리오 작가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잭은 그를 창조한 작가를 철석같이 믿고 있고 그 작가는 아주 여유롭게 하나 마나 한 걱정과 근심과 우려와 갈등을 조금씩 뿌려놓게 되는 거죠.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런 갈등 때문에 혹시라도 잭이 죽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잭의 능글맞은 얼굴을 보면 그가 결코 죽을 배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자! 여기서 이와 대비되는 작품인 <스타워즈 에피소드 4>를 보겠습니다. 

루크(마크 해밀)는 C3PO와 R2D2를 그의 노예 로봇으로 삼기 전까지 검술이나 전쟁, 포스 같은 단어와는 아무 관계가 없던 평범한 시골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비완(알렉 기네스)을 만나고 어둠의 별을 가게 되면서 이 거대한 은하계의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오비완은 루크에게 거의 전부와 마찬가지인 인물입니다. 물론 한 솔로(해리슨 포드)가 있지만 그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자죠. 그런데 어둠의 별에서 오비완이 죽습니다. 루크는 오비완만 믿고 따라왔는데 처음부터 너무 가혹한 경험을 하게 되죠. <스타워즈 에피소드 5>에서는 마침내 다스 베이더(데이비드 프로우즈)와 결투를 벌입니다. 베이더가 어둠의 편에 설 것을 종용하는데 어떤 게 옳은 것인지 확신이 없던 루크는(이미 그 전에 요다로부터 수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투 도중 끝내 팔 한쪽을 잃고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그 와중에 한 솔로는 그의 동료에게 배신당하죠. <스타워즈 에피소드 3>에서는 다스 베이더로 성장하게 될 아나킨이 강력한 군대로 제다이와 연합을 멸망시키는 스토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에피소드1, 2, 3을 통틀어서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아나킨은 정의가 아니라 악의 편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평화적인 행성 국가들을 멸망시킵니다. 만약 에피소드 순서대로 만들어졌다면 거의 경악하게 될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정의와 악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제다이를 유일하게 부활시킬 수 있는 사람, 제국에 대항하여 평화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인종들이 바라봐야 할 구세주와 같은 인물은 다름 아닌 악의 총 사령관 다스 베이더의 아들 루크입니다. 반 제국의 편에서 보면 엎친 데 겹친 최악의 상황입니다. 루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고,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해야 했으며, 수련을 통해 힘을 길러야 했습니다. 그를 도왔던 사람은 이미 죽어서 환영으로만 존재하거나 늙어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코, <스타워즈>의 세계는 주인공 루크에게 유리하게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캐리비안의 해적>을 예로 들지 않아도 수많은 영화가 주인공을 수퍼맨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술술 주인공 의도대로 움직여 줍니다. <올드보이>에서 우진(유지태)은 어린 시절 있었던 일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오대수가 결혼해 아이를 낳을 때까지(그것도 꼭 여자아이일 것) 약 15년, 또 그를 감금한 때로부터 15년, 어림잡아 총 30년에 걸친 엄청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창안한 신의 경지에 오를만한 인물로 나옵니다. 게다가 우진은 자신의 의도대로 오대수와 미도를 서로 사랑하게 하는 데까지 성공합니다. 영화 내내 우진은 자신의 계획이 행여나 실패를 하지는 않을까? 이런 짓이 과연 옳은 것인가? 등을 걱정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죽는 것도 스스로 선택했으니 우진은 어느 것 하나 실패하지 않은 신 중에 신, 제우스를 능가하는 킹 오브 킹이었던 셈입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비롯한 많은 하이틴물의 씁쓸한 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훈이(권상우)를 보십시오. 싸움도 잘하고 잘생기고, 아버지도 부자고, 여자들한테 못이기는 척 잘해주는 완벽남인데, 뭐가 잘 안 되는 것 같더니 결국 맘대로 다 되잖아요?


9. 부족한 상상력.

피카소의 작품 중에 자전거 손잡이와 안장을 가지고 황소모양으로 만든 조각품이 있습니다. 정작 그 철근을 만든 당사자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없지만 못쓰게 된 자전거를 가져다가 부속품을 떼고 이어 붙여서 만든 이런 것에 오늘날 훌륭한 예술작품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인지 이유는 간단합니다. 피카소의 황소에는 작가의 상상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만드는 장인의 경우를 생각해보죠.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준비된 설계도에 따르거나 아니면 오랜 경험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진행시켜 나가게 되겠죠.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완성본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경우 그는 뛰어난 기술자이고 장인일 수는 있으나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는 완성작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결과를 예측하고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인은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몇 시간 후면 그것이 완성될 것인 지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런 확신이 없습니다. 예술가는 어떤 것을 만들 때 자유로운 상상에 따라 불이고 떼어내고 버리고 주어옵니다. 설사 작품이 다 완성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 예술가에게 완성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를테면 자전거의 바퀴를 가져다가 황소 머리에 얹어 죽은 자의 머리에 그려지는 헤일로 같은 링처럼 사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상상력은 모든 예술의 기본과 같습니다.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하는데, 모든 영화에 뛰어난 상상력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특히 공상과학영화나 추리물 같은 경우 상상력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인데요. <죠스>나 <제3종 클로스 인카운터>, <이티> 같은 스필버그의 초기작들은 대중적인 성공을 한 작품임에도 비교적 뛰어난 상상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끄 따띠의 걸작 <플레이 타임>같은 경우는 거의 경이적이었죠.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샤이닝>도 매우 창의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별의 목소리>, <고양이의 보은>같은 아니메나 미야자끼 하야오의 작품들을 빼놓으면 안 되겠군요. 대부분 일본의 아니메들은 상상력의 극한까지 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디즈니의 <몬스터 주식회사>나 예전에 본 <눈의 여왕> 같은 애니메이션도 참 신비롭고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나네요. <말괄량이 삐삐> 류의 티비물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 아주 많습니다. 모두 예전에 티비와 영화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보았던 작품들이라 더욱더 기억에 남는 것 같네요.

그러나 우리 주변엔 상상력이 부족한 작품들이 더욱 많습니다. <내추럴 시티>나 <원더풀 데이즈>같은 야심작들의 실패는 우리 영화가 한류를 넘어서는 문화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죠. 작년과 올해 만들어진 공포영화들 중엔 신인 김성호 감독의 <거울 속으로>를 제외하면 눈여겨볼 만한 게 없었습니다. 모두 부족한 상상력 안에서 허덕이는 작품들뿐이었습니다. 신인 감독들이 도전하는 대부분의 단편영화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으면서 마음에도 없이 노동자, 농민, 장애인의 소외감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를 만들거나, 티비에서 본 걸 따라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타령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허무맹랑한 조폭들을 등장시켜 싸움을 시키는 영화들이 대부분이죠.


10. 할리우드 따라하기.

<스캔들>, <튜브>, <태극기 휘날리며>, <범죄의 재구성>, <싱글스>, <와일드 카드>, <장화, 홍련>, <지구를 지켜라> 등 수많은 한국영화가 친 할리우드를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는 브라이언 드팔마나 샘 페킨파 아벨 페라라 등의 1970, 80년대 할리우드 비급 풍에, 미이케 다카시 류의 스타일을 흉내 냈고,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병구(신하균)가 쓴 안전모에 각종 부품들을 달아놓는 등 한번 웃어보자는 고의적 삽질, 강만식 사장(백윤식)을 의자에 묶어 놓은 장면, 섬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를 틀어놓고 고문하는 장면들처럼 할리우드 영화 곳곳에서 매우 친숙하게 보아온 설정을 적극 이용했죠.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게 한국전쟁인지 2차 세계 대전인지, 1차 세계 대전인지 모를 정도로 흉내 내기가 도를 넘은 영화였고, <스캔들>은 별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에게 굳이 서양에서 가져온 없는 문화까지 대입하며 그럴 듯하게 묘사한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아직 언급되지 않은 영화들에 있습니다. 한국의 수많은 로맨틱코미디물, 공포물, 액션물, 형사물 등은 모두 할리우드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식스센스>가 뜨면 그와 유사한 반전에 목을 맨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휴 그랜트의 영화들이 뜨면 어떻게 해서든지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는 배우를 골라 영화화를 시키고야 마는 실정이잖아요. 오드리 헵번의 영향이 얼마나 컸으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럭셔리 멜로를 꿈꾸며 백마 탄 왕자가 나오는 드라마가 횡행할까요? 서양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연예 방식이 만들어졌다가 인기를 끌어 계속 인용되는 건 당연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다른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살아 왔다고  우리나라 어떤 감독의 차기작은 족보에도 없는 뱀파이어나 드라큘라 영화가 될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누구겠어요. 세계시민 박찬욱이지요. 기술적 문제만 향상된다면 <반지의 제왕>에 영향받은 어떤 감독들은 지금쯤 어디선가 한국판 판타지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해리포터를 본떠 울릉도에 지어진 마법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가 곧 등장할지도 모르겠군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스카페이스>, <칼리토>에 영향받은 영화인들이 많았던 시절, 마침 홍콩에서 불어 온 <영웅본색> 류의 액션물들이 홍수를 이루게 되면서 이런 스타일들이 결합한 한국식 느와르(<게임의 법칙>,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초록 물고기>...)가 많이 만들어졌던 현상을 경험한 관객들이라면 이런 흐름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은, 마이클 무어를 흉내 내 정치성 짙은(이왕 할 거면 올바른 쪽이길 기대하며) 다큐멘터리 영화가 곧 한국에서 탄생할 수도 있겠습니다. 모두 미국과 신자유주의라는 강력한 이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태생적 운명이자 한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하는 게 뭐 나쁜가? 그러다 보면 창조적인 것도 나올 수 있고 그런 거 아냐?"라고 말하는 분들을 위한 마지막 보너스 한마디 => 영화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그리는 거대한 화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그린 것도 남의 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최하의 평가를 받는 판에 여러 사람이 그린 미술품이 여기저기서 가져와 짜깁기한 흔적을 내더니, 결국 전체적으로 복사판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면 그걸 어떻게 봐주어야 할까요? 개인 작업실에서 혼자 감상하는 게 아니라 대형 극장에서 관객에게 돈을 받고 상영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판단한다면 말이죠. 세계 최고라는 찬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오래 관객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의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나오길 기대한다면 무작정 베껴오는 영화에 싸늘한 시선을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

자~ 10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이 밖에 생각하면 더 나올 것도 있을 것이고, 어느 정도 비슷한 유형을 중복해서 선정한 것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위 10가지 사항에 해당되지 않는 영화를 발굴하고 보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든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에 마음을 더 쓰는 것이 아무래도 정신 건강상 좋겠죠. 나쁜 영화들이 소수가 되고 좋은 영화들이 다수가 되어 더 이상 맘에 안 드는 영화 구별 기준 같은 글을 쓰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고 흉내 내지 못한 것을 창안하는 새로운 영화가 하루빨리 나타나길 기원하며...


2004.7.30. 방배동 작업실에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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