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2003 - 하나마나 한 복수극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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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노 작성일09-02-13 15:56 조회2,59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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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작. 박찬욱 감독,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 출연.
아래부터는 영화를 안보신 분들에게 유익한 글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의 전제는 최면으로 이루어지는 결과가 100%는 아니더라도 실패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대수(최민식 역)가 일본식당에서 일하는 미도(강혜정 역)를 만나도록 유도되는 것은 오대수와 미도에게 동시에 주어진 최면 덕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자주 써먹는 것 중에 이런게 있지요.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확신하지 못할 때, 골목의 한쪽에 상을 차리고 앉아 점을 보는 할아버지의 한마디처럼 영화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결말은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거짓말 같은 사주풀이는 유난히 높은 확률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이 진실이라는 이상한 믿음을 관객에게 주곤 하죠. [올드보이]에서는 '최면'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너질 수 없는 동기여야 합니다. 미도는 처음 본 오대수에게 평소와는 다른 감정을 갖도록 유도되어야 합니다. 그녀가 단지 대수의 친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최면의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대수와 미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우진(유지태)의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합니다. 또한, 가끔 채팅에서 만날 정도일 뿐이지 더 이상의 친밀함이 우진과 미도 사이에서 일어나선 안 됩니다. 그녀는 우진의 존재를 몰라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철저하게 우진의 손아귀에서 놀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도 사귀면 안 됩니다.
그녀는 TV에도 출연해야만 하며, 능숙한 솜씨로 일본 음식을 만들줄 알아야 합니다. 외국에도 나가지 못하며, 나이많은 남자에게 거부감이 없어야 합니다. 미도가 우진이 고용한 최면술사에게 최면을 당했을 때에는 이미 호텔같은 감방에서 나온지 오래된 오대수가, 필연적으로 그녀를 만나도록 효과가 지속되는 최면의 상태에 있어야만 합니다. 게다가 오대수의 입맛은 일본 음식점을 찾아가도록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운명은 엇갈릴 수밖에 없었겠지요. 다시말하면, 한 개인의 재능과 관심까지 모두 통제되는 상황에서도 미도는 아무런 의심없이 자라야만 하고, 오대수는 그 '왜' 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우진의 이마를 겨누던 흉기를 포기해야 하는 확신이 우진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올드보이]는 스타일의 과대한 집중 때문에 나머지가 소홀해진 대표적인 케이스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의 최면에 걸린지도 모릅니다. 우진의 과거를 알기 위해 찾아간 어린 시절의 학교 장면에서 오대수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 계속 바뀝니다. 우진의 누나, 수아를 쫓아가는 어린시절의 오대수는 카메라가 비켜 있다가 잠시라도 틈을 주면 어느새 최민식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과도한 기교이자, 박찬욱식 잔재주입니다. 자살하는 수아의 팔을 잡고 있는 어린 시절의 우진은,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하는 남자의 넥타이를 잡고 있던 오대수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잠시동안 멈춰 있습니다. 수아의 팔을 잡고 있는 것은 어느새 커버린 우진으로 화면에 나타나고, 곧바로 손가락은 총으로 이어지죠. 이것이 신선한 재주이자,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영화는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주장합니다.
우진의 펜트하우스는 잔재주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외국의 어느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파격적인 악당의 사는 모습(그러나 영화 애호가라면 하나도 파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는 태연하고 완벽한 계획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마스터 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보디가드를 동반한 채 상투적이지 않은 옷차림을 강조하기 위해 눌러쓴 모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기교에 다름 아닙니다. 보디가드가 죽는 모습 또한 매우 의식적인 연출로 이어지죠. 피가 난자하고 바닥엔 깨진 유리조각으로 뒤범벅되는데 카메라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애호가가 아닌 관객을 위해 온갖 스타일을 섞어놓습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과장된 이미지들은 관객의 머릿속을 어지럽혀놓고는, 영화의 모든 것을 감추고 스타일만 기억게하는 역할까지 해냅니다.
15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우진은 오대수가 커서 결혼해서 딸을 낳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들도 아니고 꼭 딸이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또 1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는 오대수의 딸이 절대로 아파서 병들거나 사고로 불구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30년이 넘는 거대한 일생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천재여야만 합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사업도 잘 꾸려나갔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다면 지독히도 운이 좋은 우진이 어린 딸이 있는 어른이 된 오대수를 우연히 발견하고 급히 복수를 꿈꾸어야 하는데, 정말 이랬다면 매우 낮은 확률의 설정이죠.
그래서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은 스타일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것으로 생각했던 풀밭에 놓인 가방에서 오대수가 기어 나오고, 또 그곳이 풀밭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박찬욱식 기교가 지겹도록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달력 인서트와, 지하철의 개미, 강아지를 안고 있던 남자의 의미 없는 자살, 주요 배역들의 과도한 클로즈업이 반복되면, 감추거나, 소홀히 다룬 이야기의 허점은 어느새 잊힙니다. 개미가 의자에 앉아 있는 비현실적 장면이 우진의 작은 실수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30년 프로젝트의 비현실성을 간단하게 가리고 있는 것은 꽤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가장 할리우드적인 외형으로, B급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박찬욱식 상업 영상은 B급의 외형으로 포장되고, 할리우드적인 수입을 올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고 예산으로, 하나 마나한 이야기(도대체 올드보이가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를 매우 파격적인 장면인 것처럼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감독에 머물러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평균이상의 연출력(충무로에서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본 영화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타일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뻔히 보이는 잔 기교를 도대체 누구에게 보여주려 한단 말입니까?
한 사람이 15년이나 사설감옥에 감금이 되고, 패싸움이 벌어지고, 살인이 벌어지고, 총살이 일어나는 가운데서도 어느 곳에서도 정당한 법집행은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PC방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그 흔한 [지구를 지켜라]에서의 전직 경찰 한 명 달라붙지도 않습니다. 30년을 넘게 기다리는 가히 신의 경지에 오른 인내심의 소유자인 우진이 공공장소에서 사람을 죽이는 흥분을 보이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관객은 없단 말입니까? 학창 시절에 적어도 어느 곳, 누구에겐가 일어날을 법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여성의 자살과, 성인이 되어서의 복수로 이어진다는 그 나약한 논리에 찬성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평생 한가지 사건만을 기억하고, 경험하고 자란다고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수치스러워 할만한 논리입니다.
마지막 장면, 오대수는 우진에게 울부짖으며 딸에게 앨범을 보이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그는 대단히 딸을 사랑합니다. 아니, 딸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의 딸과 잠을 자도록 우진이 자신에게 복수를 했다는 사실에 분노해 칼을 들고 덤비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지 우진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싹싹 비는 신세가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진은 자신의 심복까지 총을 쏴 죽이는 마당에 오대수가 구두를 핥고, 개 흉내를 내며, 마침내 혀까지 잘라버린 불쌍한 모습을 발 아래로 바라보며 승리감에 도취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거였겠죠. 참 재미있게도 30년을 넘게 기다려온 복수의 끝이 그의 '혀'였다는 결론이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아를 떠올리며 권총을 들죠.
그러니까 결국 하나 마나 한 하나객담 복수극을 본 셈입니다.
사족 1: 총 때문에 빌게 된 대수의 사연 - 앨범을 보고 미도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대수는 분노해 우진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중간에 보디가드가 막았고 그 과정에서 살인도 벌어지죠. 그런데 잠시후에 상황이 역전돼 무릎 꿇고 빌고 있습니다. 중간에 달라진 게 미도에게 리본 달린 박스가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수가 우진에게 달려들었던 그 처음의 의도를 단지 미도가 박스를 열지 말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없던 일로 해버리고 새로운 전략 차원에서 싹싹 빌자로 바뀐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대수는 처음 의도대로 그를 격투 끝에 잡아 박스를 열지 말도록 강제하거나, 아니면 우진을 죽이고 미도가 잡혀 있는 곳으로 달려갔어야 합니다. 어차피 우진의 지시가 없이는 박스를 개봉하지 않을테니까 시간은 충분한 셈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총 때문이죠. 대수의 처지에서 보면 우진이 자신을 죽이고 미도에게도 사실을 알리게 되면 끝장 아니겠습니까? 그가 총을 가지지 않았다면 격투를 해서 우진의 무릅을 꿇린 다음 전화 지시를 하도록 강요했겠죠. 상대를 묶어놓고 자백을 받아냈던 사설 감방에서의 경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진이 총을 가지고 있고, 총이란 게 순간적인 판단으로 발사되는 것이기 때문에 싹싹 빌어야만 했을 겁니다. 격투를 벌이다 잘못돼 죽으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미도에게 앨범이 보여지는 건 필연적인 결과가 될 테니까요.
사족 2: 한겨례에 실렸다는 글을 보니 과격하긴 했지만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미도와 수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헤쳐나가기 보다 순응하고 체념하는 일반적으로 고정화된 여성의 이미지 그대로입니다. 제가 미도였다면, 어렸을 때부터 그 나이가 될 때까지 항상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의심도 해보고 벗어나려고도 해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의 미도는 무슨 로보트도 아니고 철저하게 우진의 의도대로 움직이죠. 수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잘못된 사태에 항거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모든 걸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 채 자살해 버리죠. 복수는 남자들의 몫으로 남기구요. 모든 게 흔하디 흔한 낡은 관념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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