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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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노 작성일09-02-13 15:48 조회2,3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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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작.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자비에르 카마라, 다리오 그랜디네티, 레오노르 발팅, 로자리오 플로레스, 제랄딘 채플린 출연.
저는 [그녀에게]가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학적으로 기묘한 사건을 접한 알모도바르의 호기심이 발동해 만든 영화로 생각합니다. 그가 언제 진지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나요? 사랑이야기는 좋고, 기묘한 호기심은 별로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강간'이라는 재료가 사용 되었기 때문에 드린 말씀입니다.
우선 알모도바르가 작품을 구상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씨네21과의 인터뷰 기사(어떤 방식으로 했고, 얼마나 감독의 진정이 표현 되었는지는 모르지만)를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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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국 여인은 16년 만에 코마에서 깨어났다. 의사들에 의하면 그녀는 회복불능상태였다. 나는 에서 간호사들의 부축을 받고 걷는 그녀의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부활은 과학이 말한 모든 것을 반박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에서는 시체공시소의 젊은 야간 경비원이 한 처녀의 시신에 매혹됐다. 죽음의 고독은 밤의 고독에 더해져 '과다한 고독'이 됐다. 젊은이는 욕망에 항복하고 죽은 미인을 범했다. 그리고 교황이 기꺼워하지 않을 기적이 일어났다. 사랑에서 비롯된 추행에 반응해서 죽은 여자가 회생한 거다. 그녀는 강직증으로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 이 뉴스를 메모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2년 전 프랑스에서도 이 사건에 기초한 영화가 나왔다.) 살아난 여성의 가족들은 '강간자'에게 고마워했지만 감옥가는 것까지 막아주진 못했다. 대신 음식 꾸러미를 넣어주고 변호사를 대주었다. 이 기묘한 상황은 흥미로운 딜레마로 이어졌다. 법이 볼 때 청년은 강간범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보기에 청년은 딸을 살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이 스토리는 '그녀에게'에 나오는 윤리적 딜레마를 포함해 영감을 주었다. 세 번째 사건, 뉴욕에서 9년간 코마 상태인 여성이 식물인간 상태 그대로 임신했다. 며칠 뒤 병원 잡역부가 범인으로 밝혀졌다. 의학적으로 사망한 몸이 어떻게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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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것이 [그녀에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은 이 기묘한 이야기에 힘을 불어 넣기 위해 캐스팅에 신경을 썼고, 음악에 신경을 썼으며, 무용과 무성영화들을 삽입 시켰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전작들과 비교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평작이상의 수준은 되었습니다. 저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치 기독교가 서양역사에 도덕적 배경으로 이용되었던 것처럼,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이 서구인들에게 끊임없이 과대평가 되고, 문화적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이용되는 경향에는 반대합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섹스,강간,살인,포르노,동성애,양성애 그런 것들 입니다. 그는 마르코 독재정권 기간에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개인의 욕망을 풀어서 보여주되 아무런 철학도, 종교적 배경도, 이념적 주제도 없이 말그대로 자유분방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감독입니다. 그가 [그녀에게]라는 작품으로 좀 진지해 지려고 마음 먹었다고 해서 무의식속의 재료, '강간'이 밖으로 표출 되지 않을 리 없지요. 그런데 알모도바르의 무엇이 서구 평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한번 연구해 볼만한 일이죠.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의 그동안의 영화들에 비하면 [내 비밀의 꽃]과 견줄만한 최고작으로 평가 받을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영화들을 맹목적으로 응원하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헐리웃에서 영향 받은 듯한 현실주의적 영상까지 익혀가고 있는 그에게서 우화적 상상력이 사라지는 스페인 영화들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이건 말도 안돼" 라는 대사를 최근 스페인 영화들에게서 찾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죠. 왜 어떤 일이든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요?
사족1 : 자살하기 전의 베니그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마르코의 핸드폰에 LG마크가 붙어 있군요.
사족2 : 마침 cine21을 보니 황진미 칼럼니스트가 쓴 훌륭한 글이 있어 옮깁니다.
● 일방적 `보살핌`을 숭고한 사랑으로 신비화한 <그녀에게>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 <그녀에게>는 실로 당혹스럽다. 전작에 의해 확고하게 각인된 감독의 ‘정치적 올바름’과 영화 전편의 거부할 수 없는 ‘미학적 세련됨’은 비판의 전의(?)를 꺾어버리기에 충분하다. 나는 이 영화를 섣불리 비평할 만큼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 대해 모르며, 근본 천생(?)이라 예술에 대해 감히 ‘호부호형’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대관절 ‘네 믿음이 그녀를 살렸다’구웁쇼? 정부는 그녀들을 강제로 임신시켜 전부 깨어나게 하라, 깨어나게 하라…”) 이 영화를 보고 숭고한 사랑에 감동받았다는 분들, 심지어 남자가 여자에게 돌봄과 희생을 바친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는 분들께 진심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1. 아전인수식 자기사랑법
영화 앞부분에 성직자의 강간과 소아 기호증 이야기가 지나가듯 나온다. 아마도 여기에서 감독은 흔히들 혐오하는 ‘변태’라는 것에 대해 은밀한 환기를 시도한 것 같다. 고전 개념에서 성은 생식을 위한 수단이다. 그 기준에 의하면 생식에 복무할 수 있는 성행위만 ‘정상’이고, 나머지는 모두 ‘도착, 혹은 변태’이다. 동성애, 소아 기호증, 수간 등은 성행위의 대상을 잘못 택한 ‘대상도착’이고, 궁극적으로 남녀의 성기결합을 지향하지 않는 관음증, 노출증, 가학증, 피학증 등은 ‘목적도착’이다. 즉 남녀의 성기가(그것도 반드시 임신이 잘되도록 ‘정상위’로!) 결합된 해부학적 단면도가 이상적 모델로 제시된다. “이렇게 하란 말이다… 그래야 애가 생긴단 말이지… 그리고 행위 자체를 탐닉하지 말고, 생명 탄생의 성스러움을 음미할 것!” 구성애식 성교육이 이에 기반한 것임은 물론이고, 최근작 <돌이킬 수 없는>의 주제도 “동성애는 추악하고, 이성애는 아름답다. 게다가 임신까지 할 수 있으니 더욱 성스럽다”이다. 그러나 동성애가 변태의 범주에서 제외된 지금까지 이러한 개념을 고수하는 것은 성정치학적 ‘수구’이다. 쾌락 자체의 의미가 훨씬 부각되면서, 성을 ‘쾌락과 욕망의 주체들간의 자발적 상호결합’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자 도착의 기준도 바뀌었다. 즉 자발적 주체들간의 상호결합이 아닌 상태가 변태인 것이다. 동성애나 합의에 의한 가학, 피학증은 더이상 문제되지 않으며, 강간이야말로 ‘진정한 변태’가 된다.
그는 발레하는 그녀를 매일 훔쳐보며 흠모한다. 어느 날 그는 그녀 뒤를 밟다 지갑을 냉큼 주워 그녀에게 건넨 덕에 그녀에게 ‘말을 걸어’ 그녀의 취미와 생활을 ‘주워’듣는다. 그녀 방에 잠입하여 머리핀을 훔치고, 그녀의 반쯤 벗은 몸과 ‘운 좋게’ 마주치고 황급히 빠져나온다. 접근 불가능한 그녀에게 몸달아하다가 시체처럼 누워 있는 그녀를 환자로 맞는다. 이제 그는 그녀의 합법적인! 전담 간호사가 되어 매일 그녀를 씻기고 주무르며, 그녀가 좋아한다는 것을 보고 와서 말해준다.
그가 사랑하는 ‘그녀’는 대체 누구인가? 그녀는 발레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이자, 그녀 말에 의하면 주로 공연 보고 연습하며, 무성영화를 즐겨 보는 여자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앞에 떡하니 놓여 있는 탐스러운 젖가슴과 복슬거리는 불두덩을 지닌 ‘잠자는 숲속의 미녀’이다. 이것이 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모든 것이다. 그는 그녀의 복잡다단한 욕망과 고민을 모른다. 그녀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처럼, 발레공연보다는 핍쇼를 즐기고, 화면보다는 연인들을 훔쳐보며 격렬하게 자위하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는 그가 믿고 싶은 대로 ‘고상한’ 여자이자, ‘숭고한’ 대상이다. 또한 그녀는 그의 쉼없는 이야기를 침묵으로 추인할 뿐 “네까짓 게 예술을 알아? 넌 고용된 간호사에 불과해!”라며 패악을 떨지도 않으며, 그가 올라탈 때조차 정당한 항거는커녕, 경멸의 눈빛조차 보내지 못했다. 주관적 관념의 차원에서는 스스로 남근이자 정자가 되어 ‘그녀에게’ 들어갔으며, 객관적 사실의 차원에서는 그녀를 ‘강간’하여 임신시킨 그는 그녀와 결혼하겠단다.
그런데 ‘그녀에게’ 물어봤나? 의식도 없는 그녀가 무슨 의사가 있으며, 있은들 어떻게 대답하겠느냐고? 맞다. 그런데 그는 끊임없이 그녀가 살아있으며, 그의 말을 듣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파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녀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다! 그녀는 강제로 사랑받으며, 그에 의해 ‘그녀도 좋아할 것’이라고 억지 규정당하며, 마치 그녀가 의사표시를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처럼 억측된다. 그는 ‘깨어났을 때 놀라지 않도록’ 머리도 짧게 자르지 말라더니, 정작 그녀의 신체를 기절초풍하게 변형시켜놓고도 마치 그것이 그녀의 동의에 의한 것인 양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사고 전 그녀는 청지기인 그에게 접근 불능한 여신이었다. 사고 뒤 그녀는 그의 수하에 놓인 선어(鮮魚, 흡사 도마 위의 생선회이다)로 제사장인 그에 의해 우상숭배 된다. 그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물(thing)이다. 그녀의 의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녀는 ‘헌신적 사랑을 하는 자기자신에게 도취되어버린’ 나르시시즘을 되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그녀에게’ 그는 혼자 말하고 혼자 화답받는다. 그녀는 말이 없기에 완벽하다. 그는 전일적 힘을 행사하는 독재자이자, 엄마처럼 그녀를 보살핀다. 그는 어머니와 분리, 개별화가 안 된 채, ‘엄마놀이’ 역할을 바꿔가며 하였을 뿐, 독립된 개인으로 동등한 인간관계를 가져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흉포하고 불가능한 ‘사랑’(혹은 엄마놀이)의 재물이다. 그는 공권력에 의해 그녀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박탈당하자 차라리 죽어버린다. 그에게 유산으로 집을 상속받은 울보 남자는 다시금 권력자의 망루에서 그녀를 내려다본다.
2. 숭고한 사랑으로의 위장
영화는 이토록 엽기적인 ‘사랑’을 ‘숭고’하게 느끼게 하는 장치를 곳곳에 포진시킨다. 눈과 귀가 있으면 누구나 깜빡 넘어갈 기똥찬 음악이나 미술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위장술의 일등공신은 그의 도착적 사랑이 ‘전방위적으로 실패한’ 가련한 남자에 의해 관찰, 기술되고 있는 점이고, 이등공신은 무성영화라는 절묘한 가리개이다.
여기 옛사랑을 잊지 못해 걸핏하면 눈물짓는 남자가 있다. 그는 TV에서 공개적으로 실연당한 여자를 보고 동변상련을 느껴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녀를 위해 용감하게 뱀을 잡더니만, 다시금 옛 애인 생각에 울고 만다. 이에 감동한 그녀는 그의 연인이 된다. 4개월이나 사귀었을 때, 남자는 옛 애인의 결혼소식을 듣고 갈등을 일으키다 결혼식장에 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부나 그를 미워했다던 그녀 가족들은 그의 출현에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다. 더욱 이상한 것은 새 애인이 경기 전날에 결혼식장까지 쫓아와 심지어 운다. ‘내가 옛 여자와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할까봐 걱정되어 저러는 게지….’ 그는 계속 할말이 있다는 그녀 말은 듣지도 않고 “나는 다 정리했다니깐…”을 읊조린다. 그런데 아뿔싸… 알고보니, 그의 옛사랑이 아니라, 그녀의 옛사랑이 되살아난 것이라니!
사고 뒤 그는 간호사에게 “나가 있으라”는 명령을 받고, 복도를 서성이다 아름다운 자태의 공주를 목욕시키는 남자간호사를 발견한다. 그는 애인의 몸에 접근조차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비해 남자간호사가 부럽다. 남자간호사는 자신의 생체권력을 과시하며,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그에게 제사장만이 누릴 수 있는 신앙을 강요한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 것과 기적을 믿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몸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으며, 소외된 그는 복된 기적을 믿을 수 없다. 그 역시 그녀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떠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이 ‘옛 애인과의 재결합’이었다는 것을 듣자, 그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여 민주적으로! 떠난다. 그는 ‘그녀는 내가 다 알지 못한 의지가 있고,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욕망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힘겹게 끄덕이며 사막으로 갔을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상대를 주체로 인정하는 순간, 동상이몽의 슬픔을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홀랑 잊었는지, 옛 여인에게 떨리는 경계의 눈초리 한번 받지 못하고, 4개월이나 사귄 그녀에게 ‘정신적 위자료 한푼 못 받고’ 맨몸으로 쫓겨나는 처참한 그의 심경으로 보자니, 남자간호사의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관념적 사랑’은 충만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그래서 그는 간호사를 이성적으로는 사이코로 판단하지만 (“뭐, 결혼? 어디 가서 절대 그런 소리 하지마”) 감정적으로는 이미 동조되어 결코 미저리로 치부해버리지 못하고, 그의 무덤가에서 “네가 그녀를 살린 거야”라는 신앙간증을 하기에 이른다.
두 번째 위장평화전술로 무성영화 전편이 강간, 혹은 시간(屍姦)장면을 대체하며 삽입된다. 영화 속 남자는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약을 먹고, 그녀의 짐이 될까봐 홀연히 떠난다. 여자는 ‘그를 짐으로 여기는’ 엄마의 집을 찾아가 그를 데려오며, 그는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이 ‘눈 가리고 아웅’의 기문둔갑술은 그의 헌신성을 강조하며, 그의 주관적 진실은 결코 ‘강간’이 아니라 사랑이요, ‘합일’임을 즉물적으로 주지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저 강간이라고만 하는 당신들이 보지 못한 진실이 있다. 그건 사랑이었다….’ 많이 듣던 경구 아닌가? <오아시스>에서 그녀는 뒤틀릴망정 자기 의사를 상대에게 전달하였기에 둘은 합의된 사랑을 한 것이 맞고, 이들의 사랑은 정치적,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혼자만의 흉포한 망상’을 ‘숭고한 사랑’이라고 우긴다.
‘보살핌’은 권력이다. 흔히 부모자식간에 나타나는 이 권력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폭압적으로, 그러나 언제나 거부하기 힘들게 옥죄어온다. 모성이라 예찬받고,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지녔다고 신비화된다. 기적은 맹신을 낳고, 맹신은 망상을 낳는다. ‘그녀는 나의 사랑에 의해, 특히나 섹스에 의해 치유의 은사를 받을 것’이라 믿으며 사랑과 섹스를 강제하려는, 피학적이며 동시에 가학적인 ‘자칭 착한 남자’ 증후군이 출몰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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