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노 작성일09-02-13 15:27 조회2,56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1959년작. 프랑수와 트뤼포 감독, 장 삐에르 레오, 클레어 모리에르, 알베르 레미, 프랑소와 트뤼포, 잔느 모로 출연.
[400번의 구타]에는 12~14살 정도의 신인배우가 필요했습니다. 여러군데에 모집공고를 냈고 그중 어머니가 코메디 배우였던 장 삐에르 레오의 카메라 테스트를 거치면서 트뤼포는 이 어린 배우에게 매우 만족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침 영화 후반부에 감화원에서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장 삐에르 레오의 연기를 보다보면 앞으로 평생을 같이하게 될 좋은 배우를 만나 기뻐했을 트뤼포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실제 반항적이고 불우했으며 수업을 자주 빼먹고 감화원 생활을 하는 등의 트뤼포 어린시절과 연관된 모습을 볼 수 있으나 트뤼포는 이 영화가 자전적인 이야기면서도 당시 프랑스에 살았던 아이들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추기를 원했고 유명한 TV극작가인 마르셀 무씨와 시나리오의 공동작업을 하게됩니다.
덕분에 시나리오는 매우 훌륭했고 음악도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알맞도록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장 삐에르 레오가 축구를 하던중 감화원에서 도망쳐 노르망디 해안가까지 뛰어가는 장면을 계속 추적하는 카메라도 매우 인상적인데 이처럼 [400번의 구타]는 혁신적이면서도 세련된 장면과 배우들의 연기, 음악, 카메라등이 적절히 조화된 '누벨바그'의 출발이었습니다.
깐느에서 [400번의 구타]가 상영되었을때 관객과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이 젊은 작가의 영화에 박수갈채를 보냈고 장 삐에르 레오를 행가래치며 환호했습니다. 프랑스 개봉당시 흥행에도 성공하였고 작품적으로도 인정받자 이 사실은 전세계로 전파 되었고 당시 이미 촬영을 시작하던 고다르의 [네멋대로해라]등과 더불어 누벨바그의 확산을 가져오게 됩니다. 현대영화의 출발이었던 셈이죠.
[400번의 구타]가 깐느에서 수상함으로써 그동안 트뤼포가 비판해왔던 프랑스의 낡은 '양질의 전통'은 무너졌습니다. 그가 찬양해 마지 않았던 작가 감독들은 활동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그렇지 못했던 감독들은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영원한 진보란 없는 법입니다. 시대가 흘러 어느덧 5월 혁명이 일어났던 파리에서 누벨바그가 사망했다는 정성일 평론가의 언급이 있을 정도로 영화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다른 '양질의 전통'을 양산하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대다수 감독들은 멍청하고 관객들은 순간적이며 평론가들은 무능합니다. 트뤼포가 응원하고 고다르가 응원했던 감독들은 꼴도 보기싫은 흑백영화들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름들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흑백영화들을 보기 싫어하는 젊은 관객들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 비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영화는 위대하지만 관객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현실, 트뤼포가 [400번의 구타]를 만들며 항의하던 당시의 프랑스와 지금은 별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