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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노 작성일09-02-13 12:02 조회2,1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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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평론가의 글로 대신합니다.

한국에서는 아줌마가 되어야 권리를 되찾을 수 있고, 깡패가 되어야 의리를 지킬 수 있다.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이걸 그저 아이러니라고 불러야 할까? 지난 겨울 내내 우리는 장진구가 끝 갈 데 없이 비열해지는 동안 아줌마의 맹활약을 보면서 이걸 여성의 권리회복이라고 불렀다. 그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영화관을 돌아보았더니 곽경택 감독의「친구」가 개봉되어 있었다. 뮤직 비디오 채널은 앞을 다투어「친구」의 주제가를 방영하는 중이고, 스포츠지에서는 "어쩌면「공동경비구역 JSA」의 기록을 깰지도 모른다"라고 기사 제목을 뽑았다. 아직 상영 중인 영화의 흥행결과를 점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궁금해진 것은 왜 의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깡패들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그냥 비유적으로 궁금해진 것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진 것이다.

깡패영화에 동조하는 이유

곽경택 감독은 이 영화를 자기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자서전이라고 불렀다. 그럴지도 모른다. 영화의 모든 장면을 감독 자신의 고향인 부산에서 찍었고, 영화 전편에서는 부산 사투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영화는 1964년생 친구들의 17년에 걸친 이야기이다.

1976년, 깡패 아버지를 둔 준석(유오성)과 장의사 아버지를 둔 동수(장동건), 모범생인 상택(아마도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 밀수업자 부모를 둔 중호는 매일 같이 어울린다.『플레이보이』를 함께 보고, 이소룡 흉내를 내고, 생전 처음 비디오로 포르노를 보고, 바닷가에서 "(올림픽 메달을 받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과 바다거북이 중에서 누가 더 헤엄을 잘치나'를 궁금해 한다. 1981년,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 네 명은 또다시 어울려 다닌다. 하지만 영화관 화장실에서 몰매를 맞던 상택를 구하려던 준석과 동수는 패사움으로 퇴학을 당한다. 1983년, 대학생이 된 상택과 중호는 어머니를 여의고 히로뽕 중독이 된 준석을 찾는다. 준석은 아버지를 떠나 깡패가 되고, 감옥에 갔다온 동수는 장의사가 되기 싫어서 깡패가 된다. 1990년,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상택은 나이트클럽을 하는 중호를 만난다. 그리고 준석과 동수가 정반대 깡패 패거리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수가 행동대장이 되어 준석 패거리들을 회칼로 난자하자, 준석이 찾아와 화해를 부탁한다. 동수는 거절한다. 회합장소를 나오자마자 비 내리는 거리에서 기다리는 것은 칼잡이들이다. 24번 회칼로 배를 쑤시는 칼잡이에게 동수는 유언하듯이 말한다. "나, 마니 묵었다. 고마 해라." 1993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상택은 자포자기하듯이 잡힌 준석의 재판정에 간다. 그저 부정하기만 하면 무죄가 되는 법정에서 준석은 자기의 죄를 인정한다. 유치장을 찾아간 상택은 준석에게 헤어지면서 외친다. "준석아, 다음 달에도 면회 올게" 준석은 이게 마지막 면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걸 상택도 알고 있다.

내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친구」를『한겨레」와『조선일보』와『동아일보』 그리고『중앙일보』의 주말영화란이 사이좋게 동시에 두둔한 것이며('영화는 세상의 반영이며 글쓰기는 반영된 세상이다'는크라카우어의 말은 농담일까), 인터넷 신문인『딴지일보』와『오마이뉴스』에서도 이의없이 호의적인 소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참 별일이다. 깡패영화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는 구체적인 연대기적 기술을 하고 있지만, 남한의 근대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게다가 부산의 지역사에도 아무 관심이 없다. 그냥 깡패 친구를 둔 '네 명의 부산 싸나이들과 한 명의 가시나'의 이야기이다.(그런데 그 '가시나'는 사실상 거의 역할이 없다.)

물론 휘황찬란한 촬영과 멋부린 후반 작업들, 게다가 뮤직 비디오처럼 연결된 편집과 심금을 울리는 대사들, 여기에 귀에 익숙한 팝송들은 시종일관 우리를 쥐어흔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미학적인 새로운 경지에 이르려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수없이 "우리는 친구 아니가?"라는 반문만이 있다. 그게 감동이 될까.

사라진 친구들과 남은 친구

그 반대로 내게서 관심을 끈 것은 친구들 사이의 우정이 아니라 이 영화가 상택의 회상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상택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또는 그의 곁에는 더 이상 깡패친구들이 없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이 영화는 그들을 기억한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친구들과 '살아남은' 상택 사이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무엇일가? 준석과 동수의 공통점은 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또는 준석과 동수는 어머니가 없다.(준석은 어머니를 여의자 히로뽕 중독자까지 된다.) 그 반대로 상택은 끝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는 그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말하자면「친구」는 부모 아래서 자란 상택의 기억 속에서 편리하게 각색된 것이다. 그 기억 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두 친구가 상택에게 보내는 우정은 거의 편집증적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영화는 준석과 동수 둘 사이의 우정이 아니라, 상택에게 서로의 방법으로 우정을 바치는(!) 이야기이다.(준석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의 제안을 거절한 동수는 일어나면서 느닷없이 자기부하에게 '친구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가자고 말한다. 나가면 기다리는 것은 칼잡이들이다.) 여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깡패들이 사람을 때리고 회칼질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 잘못에 호의 표명하는 것은 그 잘못의 이유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준석과 동수는 잘못된 아버지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에게 뺨을 맞으면서 "너희 아버지는 무얼 하시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에 둘 다 괴롭게 대답한다.) 깡패 아버지와 장의사 아버지는 이상한 직업이다. 한 아버지가 폭력과 관계하고 있다면, 다른 아버지는 죽음을 끌어안는다. 그것은 사실 앞서거나 뒤서는 것이다. 준석과 동수는 폭력 끝에 이르는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그들이 아버지를 버리는 것은 그 길을 벗어나서 상택의 길에 들어가고 싶어서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버리지만, 그 둘은 아버지의 길을 고스란히 따른다. 준석은 깡패가 되고, 동수는 결국 거리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신기하게도 그들 곁으로 상택이 다가갈 때마다 그들의 기회는 봉쇄당하고 운명을 따르는 것이다. 1981년, 고등학교에서 만난 이들이 퇴학을 당하는 것은 몰매를 맞는 상택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상택이 자신의 길로 오는 것을 준석은 거절한다. ("인자부터 니는 니처럼 살아라. 나는 나처럼 살께.") 1990년, 동수는 상택의 유학길을 보기 위해 공항에 가려다가 난자 당한다. 왜 그의 유학길을 배웅해야 하는가? 1993년, 준석은 법정에서 동수의 살해교사 지시에 대해 '쪽팔려서' 시인한다. 누구에게 창피하기 때문인가? 언제나 그 장소에 상택이 있다. 상택은 종종 준석과 동수의 세상을 흠모하지만, 그러나 정말 갈망하는 사람은 준석과 동수이다.(준석은 상택에게 고백한다. "그때 니가 가출한다고 나를 찾아왔을 때 사실 나는 니가 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상택의 세상은 영화 바깥의 세상이 되고, 영화 안에 그려지는 세상은 온통 준석과 동수의 폭력과 죽음의 질서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속의 세상은 부서지고 말소시켜야 할 세상이다. 또는 영화는 언제나 현실보다 부정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세상은 언제나 등장인물들과 함께 부서진다. 준석과 동수의 죽음은 예정된 인과율이다.

폭력과 희생에 대한 동의

그런 의미에서 준석과 동수는 상택의 통과제의를 위한 희생양이다. 그들이 상택을 위해서 죽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상택의 자리에서 그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택을 대신해서 상택이 흠모하는 여자를 골방으로 부르고, 패싸움을 하고, 거리에서 차를 세우고, 깡패들을 거느리고, 결국 그것이 죽음을 부른다는 사실을 실현시켜 준다. 상택은 준석과 동수의 그 어떤 희망도 만족시켜 주지 못하지만, 그 둘은 상택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다. 그렇게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고 (남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남자들 사이의) 의리이다. 그렇다면 그 대신 치러야할 대가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욕망에 사로잡힌 히스테리를 위한 기억상실이 있다. 역사를 완전하게 잊어버리고, 그 역사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때리고, 부수고, 죽이는 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 그 불구가 된 기억은 동정을 받고, 자신이 욕망하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침묵과 인정의 카르텔이 성립한다. 우리 사회의 의리는 희생의 논리이며, 폭력에 대한 침묵의 구조이며, 죽음에 대한 책임회피의 인연이다. 함께 사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의리는 얼마나 잔인한 이기주의의 탈을 쓴 계급의 재생산인가?

어쩌면「친구」는 그저 감독 자신의 소박한 자서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이 영화 안에 담긴 깡패들의 의리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폭력과 죽음과 희생의 은폐에 눈감는 집단적인 동의이며, 더 나아가 그것을 휴머니즘과 바꿔치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깡패들의 유혹에 대한 대중적인 굴복이다. 또는 그것을 실현시키는 깡패들의 힘의 논리에 대한 한없는 매혹이다. 여기에는 선택이 있다.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 어느 쪽도 나쁜 이유는 주인공의 자리에서 우리를 이끄는 상택이 무력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좋은 세상에 대해서 무력해진 것이다. 깡패들이 지켜 주는 의리에 감동하는 동안 우리는 폭력에 대해서 관대해질 것이며, 나쁜 세상에 대해서 무력한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정말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과 바다거북이 중에서 누가 더 헤엄을 잘 칠까.

- 평론가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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