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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작은 별넷이기를 - 괴물 *** 수퍼맨 리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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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노 작성일09-02-13 18:10 조회2,6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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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The Host 2006 ★★★

thehost.jpg봉준호 감독. 변희봉,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 고아성 출연.

영화 [괴물]은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총체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활용될 수 있는 최적의 영화로 생각합니다. 이준익 감독이나 배우 감우성, 정진영, 이준기 등 확실한 비주류(이제는 달라졌지만)가 이뤄낸 [왕의 남자]의 흥행과는 달리, 한국의 주류 영화계가 타협 가능한 모든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만든 것이니만큼, 산업으로서의 한국영화가 [쉬리]라는 대도약의 시점 이후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따져 보기에 무리가 없는 영화로 보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단지 봉준호 감독 개인의 영화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충무로를 폭넓게 장악하고 있으면서 영화에 관해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창의적이고 가장 열광적이라고 일컬어지며(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우리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라는 이른바 영화 386 세대 감독들을 동시에 살피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공통점은 별로 없으면서도 각기 다른 방식과 장르로 빠르게 한국 영화계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박찬욱, 김지운, 최동훈, 류승완, 봉준호, 이재용 감독 등의 동 시대적 감성을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만든 하나의 영화에서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화는 미군 기지의 영안실에서 불법적으로 한강에 방류된 다량의 포름알데히드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물질은 매우 유독한 것으로써 아무리 소량이라 하더라도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독극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 사건은 당시 떠들썩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미군의 범죄행위는 비단 이것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미군은 그때마다 주둔국이 부담해야할 수많은 비용과 대가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상대의 처지를 소홀히 취급했다는 반성은 일시적이고 소규모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인식은 결코 자연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시위해서 고쳐야 하는 것인데도, 당대에 충실하자는 현실주의자들의 의도적 무관심에 외면당하기 일쑤였고, 그런 이유로 미국과 미군에 대한 일반화된 부정적 시선이 있었음에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미국적인 것은 더욱 한국에서 기승을 부릴 수 있었습니다. [괴물]은 그런 수많은 미군의 해악 중 포름알데히드 방류사건에 주목했습니다.

우선 눈에 띄었던 건 한강에 뿌려진 독극물의 부작용으로 기형 성장을 한 괴물 표현의 기술적 완성도였습니다. 마지막에 괴물이 불에 타는 장면이 어색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했고 할리우드에서 탄생한 다른 괴물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시아에서는 2000년에 나온 일본영화 [쥬브나일]의 경지에 어느 정도 도달한 수준이었고, 할리우드로 치면 8,90년대 [터미네이터]나 [에일리언]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CG로만 보면 중국이나 홍콩은 이미 넘어섰고, 최근의 [철인 28호], [캐산], [리터너]같은 영화의 기술력에 대한 실망으로 볼 때 이미 일본도 넘어 아시아 최고 수준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괴물의 움직임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좀더 생동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든지, 단지 외형적으로 무서운 괴물일 뿐만 아니라 실제 그 움직임에서 공포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점 등에서는 모자람이 없진 않았지만 말이죠.

그 다음에 보인 것은 정치 비판적 설정이었습니다. '덜떨어진 한국의 관료, 덜 중요한 한국의 피해자' 이것은 영화가 시작된 이후 줄곧 강조되며 화면을 장식한 메시지였습니다. 방역업체로부터 뒷돈을 받는 방역 당국 관계자, 맡은 업무만 하도록 충실히 기계화된 의료진과 경찰, 군대 조직 등 부패하고 무능한 인물들 천지였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공권력의 빈자리는 미군과 미국의 체계화된 대 세균전 조직이 차지하게 되죠. 괴물의 습격으로 희생자는 수십 명인데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이유로 생존자 추적보다는 목격자를 감금하기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과, 괴물에 대항해 싸우다 사망한 미군 병사에 대한 미국 측 추모열기를 대비해 보여주면서 비판은 극대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가족애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한 개인으로 보면 한심해 보이는 구성원이지만 찐하기 그지없는 가족애입니다. 물론 외부에서 온 강력한 위협을 다룬 영화나 재앙영화들에서 가족애를 강조하는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스필버그의 [우주전쟁]도 기본적으로는 가족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죠. 이 영화에선 여기에 좀 더 인간미가 넘치는 봉준호식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가족애라는 점에서 정서상으로 훨씬 편한 느낌이 들고 있었습니다.

또한, 강두(송강호)와 남일(박해일)의 불완전한 인간상은 필수적으로 무리한 결과를 동반했고 그것은 부조리한 상황을 부조리하게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는 코미디로 연결되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386감독들의 유일한 공통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거죠. 이들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접근에서 우리에겐 이미 대중적이 돼버린 블랙코미디의 요소를 빼놓지 않고 사용합니다. 웃기지만 무작정 웃을 수만은 없는 부조리에 대한 코믹 묘사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은 386 세대와 때마침 찾아온 영화 산업화가 결합해 낳은 필연적 수단과 방법이 되었습니다.

저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하는 방식과 메시지를 이해하고 즐기려고 노력 중인 사람입니다. 영화를 산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투자대비이익률을 도저히 외면하기 어려운 환경에도 자기 목소리를 꾸준히 낸다는 게 어렵다는 걸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은 더욱 영화의 상업적 완성도에 신경을 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완성도에 대한 고민은 그런 환경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선택한 노력의 일환일 테니까요.

정리하면...

1. 만연된 부패와 무능, 무관심에 대한 비판과 경종.
2. 가난한 서민의 가족애.
3. 촬영, CG의 기술적 완성도.
4. 비참하고 부조리한 상황에 관한 블랙 유머.
5. 변희봉, 송강호 등의 연기

다섯 가지 정도로 [괴물]에 좋았던 점을 간추릴 수 있었습니다.

요 몇 년 사이에 충분히 과대평가 되고 있는 [플란더스의 개]에 비하면 분명한 성장이지만 [살인의 추억]과 비교하면 봉준호의 영화성은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단지 꾸준히 목소리를 내면서도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논쟁거리가 될 만한 영화를 만드는 그 배짱과 능력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을 뿐.

이제부턴 맘에 안 드는 부분입니다.

감독은 어린 시절 한강에서 괴물이 나타나는 상상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네스호나 아르헨티나의 괴물, 히말라야의 설인, 아마존강의 식인어, 식인종 같은 흥밋거리 기사들이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서 다른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들의 상상은 분명히 그런 것들에서 영향받아 생긴 것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을 신비롭게 그리는 데서 모자라 실질적인 위협의 존재로 묘사한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유럽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향했던 유럽인들의 불안감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킹콩], [해저 2만리] 같은 영화들로부터 우주시대를 맞이하면서 생겨난 [우주 전쟁], [혹성 탈출], [테러 혹성]에서 [스타쉽 트루퍼스]에 이르기까지 그런 불안감을 다룬 영화들이 수많은 문학 작품과 더불어 창작되었습니다.

원폭을 맞은 일본은 수많은 기형 생물의 출현을 몸소 체험한 덕에 괴수의 상상을 좀 더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잦은 원폭 실험의 결과로 [Them!]같은 종류의 돌연변이물이 미국에서 유행하던 시기가 맞물리면서 일본에도 괴수영화를 비롯해 일본섬 곳곳에서 예전부터 내려온 각종 전설이 결합된 판타지 아니메 특촬물 등 독특한 상상물들이 유행하고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다릅니다.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역사에서 괴물은 다른 나라에서 탄생한 상상물의 영향 없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없기 때문에 고작 해야 한강에 방류된 포름알데히드까지 끌어들여서야 마지못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수준입니다. 봉준호의 [괴물]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와 극지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처음 보는 이상한 생김새의 인간과 동물을 괴물로 묘사하며 유럽이 아닌 다른 외부세계의 위협을 강조했던 서양인들의 상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대중성에 기반을 둔 영화라 하더라도 좀 더 다른 상상이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변이로 탄생한 괴물이 인간을 위협하는 게 당연하고 인간을 잡아먹다가 죽게 된다는 기본 이야기는 그 안에 아무리 가족애를 넣고 블랙 유머를 삽입해도 결국은 같은 이야기가 아닐는지요. 스필버그의 [우주 전쟁]에서 외계인들은 지구를 무작정 공격하다가 결국은 몰살당하며, 피터 잭슨의 [킹콩]에서 콩은 인간 여성을 끔찍히 사랑했는데도 결국은 죽어야만 한다는, 그래야 안심이 되고 그래야 평화가 온다는 그 뻔한 할리우드식 결론의 형태에서 벗어나는 상상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괴물]에 담긴 메시지들이 직설적이고 단순하며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염병의 노골적 사용은 지난 시절 정치적 갈등 상황에 대한 과격한 추억에 다름 아닙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삽입한 시위 장면이 함축성을 상실한 것이라 못마땅했는데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등장했다는 점에서 꽤 실망스러웠죠. 전략적으로 배치된 미군의 이면에 놓인 역할과 정치적 속박보다는 감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 쉬운 독극물 무단 방류 같은 사건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독극물 방류를 지시하며 내뱉는 미 군의관의 직설적 대사는 마치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잘하는 스포츠인 양궁을 캐릭터화한 점도 꽤 작위적이었습니다. 가볍게 생각하다 지나치기 쉽지만 영화가 한꺼번에 많은 것을 주장하면서도 알기 쉽게 표현해야겠다는 발상으로 만들어지면 감상자에겐 은은한 영화보기의 매력이 줄어든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영화에서의 함축성은 예술적 상상력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마에 '나 나쁜놈', '나 좋은놈'이라고 써붙이고 다니지 않던 캐릭터가 중요한 장면에서 임무를 해내거나, 끝까지 강조되지 않던 뒷전의 이야기가 결론으로 가는 실마리를 은유적으로 제공할 때 관객의 보고 듣는 즐거움은 배가됩니다. 굳이 강두가 잡혀 있던 임시 보호소 앞에서 미군들이 고기를 굽는 장면을 일부러 넣지 않아도, 굳이 포름알데히드를 그냥 버리라고 노골적으로 예기하는 대사가 없더라도, 굳이 화염병 투척을 슬로비디오로 보여주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TV 뉴스를 보여주는 단 몇 개의 장면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분노를 느끼고 생각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문제가 남았습니다. 이것도 봉준호 감독 뿐만 아니라 386 세대 감독들의 몇 개 안 되는 공통점 중 하나인데요(역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3류 감독들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 [괴물]의 결론 부분을 보면, 딸 현서(고아성)와 함께 하수구에 갇혔던 꼬마를 강두가 함께 살며 키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경계심으로 가득한 채 말이죠. 그런데 이게 너무 부족합니다. 도무지 여운이 남질 않습니다. 남일이는 어떻게 됐고, 남주(배두나)는 어떻게 됐는지, 괴물이 나타났다가 죽어 사라지면서 동시에 모든 이야기가 종결되는 마무리는 평범한 3류 액션영화와 흡사합니다. 정작 함축을 해야할 곳에는 안하고 이미 결론이 났으니 더 끌어봐야 이득 될 게 없다는 발상으로 에필로그를 죽이는 영화는 대부분 그 생명력이 길지 못합니다. 정말 가족애가 목적이었다면 희봉(변희봉)의 장례식이라든지, 남주나 남일이가 등장하는 단 한 장면의 후기라도 덧붙였어야 하는 것 아닌지요.

정리하면...

1. 괴물 캐릭터의 고착성.
2.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다른 종류의 위협에 대한 상상력 부족.
3. 메시지 표현의 단순성, 과장성.
4. 미완의 에필로그.

그럼 별점은? [우주 전쟁]보다는 확실히 위입니다. 기술적으로는 뒤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외계인을 티라노사우르스처럼 묘사한 그 영화의 해로운 생각에는 도저히 눈길이 가질 않습니다. [에일리언 1편]보다는 아래입니다. 물론 [죠스]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최근에 나온 할리우드의 괴물 영화들보다는 낫습니다. 결론은 **1/2과 *** 사이인데, 1,00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기록을 갈아치울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 을 날립니다. 먼 훗날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때는 **** 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길 기대해 보면서...


수퍼맨 리턴즈 Superman Returns 2006 ★★★

superman_r.jpg브라이언 싱어 감독. 브랜던 라우스, 케빈 스페이시, 케이트 보스워스 출연.

[수퍼맨 리턴스]는 할리우드의 복귀한 영웅물들과 비교해 흠잡을 데가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포함해 [배트맨 비긴스]. [스파이더맨 2]. [엑스맨 3] 모두 훌륭한 연출자를 만난 덕에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작품들인데요. 특히 수퍼맨 시리즈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더해저 더욱 흥미진진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 쉽게 척척 해내는 냉전시대의 자랑거리 수퍼맨이 아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 되어 돌아온 수퍼맨에게는 지난 시절과는 다른 시선이 필요할 거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떠안은 운명의 소유자 수퍼맨. 황진미의 유치한 비난보다, 남동철의 외로운 지지가 어울리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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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 리얼리즘 화가 일리야 레핀의 작품으로 유배를 갔던 남자가 갑자기 집안에 나타나자 당황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내는 놀라 일어서고 아이들은 초라한 몰골의 사내를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여인은 남편이 유배를 떠난 뒤에 새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갑작스러운 남편의 등장에 기뻐하기보다 난감해하는 것이리라. <수퍼맨 리턴즈>의 설정은 어쩌면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5년 전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던 슈퍼맨이 클라크 켄트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 로이스는 그를 반기지 않는다. 로이스의 옆엔 남편과 아들이 있고 로이스는 “왜 우리는 더이상 슈퍼맨이 필요없는가”라는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을 예정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처럼 슈퍼맨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되어 돌아온다. <수퍼맨 리턴즈>가 주목하는 것이 ‘슈퍼맨의 비애’일 것이란 예고이다.

<수퍼맨 리턴즈>는 슈퍼맨의 비애를 슈퍼맨의 수고를 통해 그려가는 영화다. 만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대목이며 1978년 리처드 도너의 영화에서도 담기 힘들었던 부분이 바로 슈퍼맨의 수고를 정밀하게 포착하는 장면들이다. 막대한 제작비와 첨단기술이 아니라면 슈퍼맨의 안간힘을 지금처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슈퍼맨이라면 손가락 하나로도 추락하는 비행기를 멈춰세워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슈퍼맨도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수퍼맨 리턴즈>가 비교적 물리법칙에 충실한 이유도 슈퍼맨의 노고에 주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추락하는 비행기의 가속도와 무게를 실감나게 표현할수록 슈퍼맨이 비행기 추락을 막느라 얼마나 힘든지가 절절히 드러나는 식이다. 영화에서 렉스 루더는 슈퍼맨을 신이라고 부르며 자신은 신의 불을 훔쳐 인간을 이롭게 하는 프로메테우스라 칭한다. <수퍼맨 리턴즈>가 참조한 신화가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대목이다. 렉스 루더의 말엔 한 가지 틀린 것이 있다. 슈퍼맨이 인류를 구하러 온 신의 아들(예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슈퍼맨은 신인 동시에 프로메테우스다. 창공을 날아올라 지구를 내려다보는 슈퍼맨의 귀엔 인류가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그는 소임을 다하고자 죽을힘을 다해 날고 죽을힘을 다해 버틴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모습이자 독수리에게 간을 내어준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이다. <수퍼맨 리턴즈>는 그렇게 죽을힘을 다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끌어낸다. 그건 불가능에 도전하는 축구대표팀의 투혼에 울고 웃었던 것과 비슷한 경험이다. 기적은 그렇게 이뤄진다.

슈퍼맨은 오랫동안 손쉬운 비난의 대상이었다. 초강대국 미국의 상징이자 보수적 백인 중산층의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며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슈퍼맨은 선악 구분이 너무 뚜렷한 세계의 영웅이었다. <수퍼맨 리턴즈>도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는 영화는 아니다. 악당이라고 모두 렉스 루더처럼 동정의 여지가 없는 자들인 것도 아니고 슈퍼맨이라고 선과 악을 늘 무 자르듯 잘라 선의 편에만 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퍼맨 리턴즈>의 슈퍼맨을 보고 있노라면 비판에 앞서 슈퍼맨의 애처로운 처지를 동정하게 된다. <엑스맨>이 그랬던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는 특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안다. 놀라운 시각효과들도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써야 한다는 점도. 논쟁의 여지가 많겠지만 나는 <수퍼맨 리턴즈>를 지지한다.

- 씨네 21 남동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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