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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의 영화를 반대합니다 -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장준환 그리고 류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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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노 작성일09-02-13 17:37 조회3,3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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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영화 팬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감독 4인방과 +1이 있습니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장준환 그리고 류승완이 그들인데요. 모두 바노와영화에서는 별볼일없는 2류 감독이거나 아직 확실하지 못한 감독으로 평가하는 분들입니다. 개인적인 악감정이나 무슨 질투심 같은 것은 없고 순전히 그들이 영화라는 것을 대하는 생각이나 자주 보여주는 선호하는 양식 등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맘에 안 들어도 많은 영화팬이 좋아하면 뭐 그만이긴 합니다. 여전히 영화는 만들어 낼 것이고 그때마다 꾸준히 일정한 수의 관객을 모으게 될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 같은 경우는 심사위원을 잘 만나 세계 최고의 영화제를 통해 극적으로 이름을 알렸으니 아마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를 주목하는 팬들이 많아졌을 겁니다. 덕분에 칸 외에도 여러 아류 영화제에서 [올드보이]는 여전히 인기있는 영화가 됐죠.

이들 4+1명은 앞으로 큰 변화가 없는 한 계속해서 바노와영화 사이트에서만은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김기덕과 홍상수를 그렇게 봤던 것처럼 말입니다. 뭐 이들 4+1 감독이야 이런 사이트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고, 알아봤자 평범한 영화애호가 한 명에 불과한 사람이 제 마음대로 생각하는 걸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어차피 저처럼 뭐라고 하면서 비판하는 사람보다는 지지해주는 네티즌과 언론의 수가 더 많고 막강할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비판하겠습니다. 박찬욱이 테렌스 맬릭의 영화 [씬 레드라인]을 감독이 읽은 안읽든 관계없이 지루하다며 마구 깎아내렸듯이 저도 이들 감독의 영화를 본인이 읽든 안읽든 관계없이 제 맘에 안들면 마구 눌러주겠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그들이 없어져야 한국영화가 발전한다는 둥 그런 의미는 아니고 그들의 영화만들기 방식이 좀 달라졌으면 하는 선한 마음에서의 비판이라는 점을 읽는 분들이나 본인이나 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맏형격인 박찬욱 감독부터 볼까요? 

박찬욱 개인의 신상이나 그동안 살아온 역사에 관해서는 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서 이름을 간단하게 치는 것만으로 충분한 조사가 가능하니, 여기서 또 언급하면서 넷의 하드공간을 낭비하지는 않겠습니다. 바로 작품으로 들어가서, 그의 초창기 영화들을 보죠.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만들 당시 그는 영화만들기에 대한 기본기보다는 열정만 넘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설프고 굶주린 영상으로 가득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박찬욱은 여러 잡지에 영화평을 기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알비노 앨리게이터]에 대한 평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영화를 무척 많이 보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죠. [달은 해가 꾸는 꿈]은 머릿속에 남아 떠돌던 그때까지 봤던 수많은 영화의 이미지들로 채워지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부족한 초기작은 만들어지자마자 컬트가 됐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완성도가 떨어지고 흉내에 불과한 영화였으며, 영화를 같이 만들었던 스텝들에게 "이건 영화도 아니다."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지만, 모든 게 천편일률적이고 고리타분한 화면이 다수를 차지했던 당시의 한국영화들 가운데에서 뭔가를 좀 아는 영상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소수지만 열렬한 지지자들을 탄생시키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 [3인조]는 그로부터 한참 후 만들어졌습니다. 아마 데뷔작의 실패 이후 1993~96년까지는 영화만들기를 거의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찾으려고 방황하던 시절이었을 텐데, 아마도 영화에 대한 광적인 애정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첫 작품에서도 당시 최고의 가수 중에 한명이었던 이승철을 내세워 인디정신과는 거리가 먼 방식을 택했었는데, [3인조]는 그런 박찬욱의 주류성향이 더욱 노골화된 영화였습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기배우였던 이경영, 김민종, 정선경 카드는, 미국 주류영화의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던 이무영과의 만남과 더불어 이 영화의 색깔을 명확히 규정해버렸습니다. 물론, 결과는 기존의 한국영화를 철저하게 답습한 공포의 졸작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다시 2년 후에 만들어진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이영애, 이병헌, 송강호 같은 몸값 높은 배우들을 대거 동원해 만들어 흥행작이 되었고, 완성도면에서도 기존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 소득이 있었지만, 당시 주류 한국영화의 큰 흐름에서 이해될 수 있는 영화였지, 박찬욱의 스타일이 강하게 드러난 영화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당시 남북화해무드에 걸맞은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기획에 박찬욱 개인의 연출력과 노동력을 제공한 것에 불과한 작업이었습니다. 우산에서 팔각정으로의 디졸브, 한장의 사진에 모든 주요 인물을 배치하는 등 몇 가지 솜씨가 선보였으나 창조적인 것은 아니어서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죠. 

[아나키스트], [휴머니스트] 같은 범작 영화의 각본을 쓰던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으로 [복수는 나의 것]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던 이때 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다른 주목을 받던 감독들 중에 늘 선두에 있는 기대주였었습니다. 저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에서 따온 제목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박찬욱에 대한 굉장한 기대와 신뢰를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목을 다쳐 고개를 숙이고 책을 보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서점에서 [복수는 나의 것] 제작기에 관한 잡지의 기사를 줄곧 서서 끝까지 읽어봤을 정도이니까요. 잘 아시겠지만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은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며 사회적 모순을 꼬집고, 곳곳에 잔재해 있던 군국주의의 흔적을 드러내며 비판하는 심리드라마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잔혹한 군사정권이 있었고, 전작에서 이미 북한 문제를 건드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뭔가 의미깊고 냉철하게 정치,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영화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철저하게 하드보일드라는 포장으로 장르의 게임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을 보여주었습니다. 

공장의 기계에 귀속된 인간, 청각장애인, 밀매업자, 자본주의의 모순, 못가진자, 착취하는 자 등 여러 가지 전제들이 채 틀을 형성하기 전에 박찬욱은 서둘러 날카로운 칼과, 흥건한 피와, 잔인한 복수로 여기저기를 물들여 놓고는 관객의 관심사를 애매한 곳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영화는 분명 계급적 문제의식을 띄는 것으로 출발했는데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구체적인 효과들이 하나씩 표면화되면서 부조리에 대한 묘사는 무력해지고 허황되며 왜곡되었습니다. 할리우드의 상업적 형식과 경향이 어설픈 좌파 이념을 만나 혼탁해진 결과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로 심리적 파국을 맞는 건 복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감각적인 살인마들로 가득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복수'라는 젊은 관객들이 선호하는 테마에 빠르게 편승하는 감독과 기교에 열광하는 형식주의적 관객일 뿐이었습니다. 

이 영화 이후 박찬욱이 공동으로 각본을 쓴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과 아시아 3국 합작영화 [쓰리 몬스터 : 컷]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잔기교를 부리는 이야기에 심취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은 마치 이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한물 간 세계컬트영화목록 100선의 리스트에 자신의 영화를 올려놓는 게 목표인 듯한, 비정상적인 기교와 장치에 의존하는 영화들이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불완전한 상황마저도 유희의 실험 극으로 포장하는 발상은 필연적으로 [올드보이]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해외의 평론가는 [올드보이]에 대한 열광은 포스트모더니즘 붕괴의 불안한 징후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붕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는 차원에서라면 긍정적이겠지만, 아쉽게도 새로운 것이 아닌 장르의 관습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그 붕괴의 징후라는 것은 곧 회귀를 뜻하는 것이겠죠. [올드보이]의 핵심 스토리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젠 노골적으로 [복수는 나의 것]의 전제가 됐던 문제의식은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죠. 이제 영화는 근사한 배우들 데려다 놓고 한판 놀아보자 분위기가 돼버렸습니다. 노는데 필요한 소품으로 군만두가 선정됐습니다. 또 한 명의 잔기교파 감독 장준환은 [지구를 지켜라]에서 파스를 써먹었죠. 

노는 데는 여자의 가슴만큼 효과적인 건 없습니다. 강혜정과 윤진서 두 배우의 은밀한 가슴을 보여주면서 일단 눈길을 끈 다음, 젊은 층이 두루 좋아하는 칼, 총, 피, 여자, 성관계, 화면빨, 조명빨 등을 필수로 깔고 쇼킹하고 파워풀한 장면으로 도배를 해놓으면 이제 힙합 춤을 추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춰진 셈입니다. 노래를 못 부르니 춤이라도 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힙합이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한쪽 손으로 귀를 막고 한 손으로는 판을 돌리며 신들린 춤을 춘다고 다 훌륭한 힙합전사가 되는 건 아니죠. 그러나 노래를 잘 불러야 할 필요없이 랩과 춤만으로도 충분히 가수가 되는 시대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인정하는 것과 같이, 한번 놀아보자는 시각적 흥분감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어느샌가 작품성, 예술성을 갖춘 것으로 미화되고 부풀려지게 되었습니다.

박찬욱의 강점은 이런 겁니다. '기존의 한국영화가 얼마나 다양한 장르를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신뢰를 상실했는가.', '칼이 등장하면 으레 조폭영화였고, 섹스가 등장하면 으레 에로영화였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런 문제의식. 그러니까 [3인조]까지는 자신도 그런 충무로의 관습에 매몰되었지만 서서히 눈을 뜨게 된 한국영화의 현실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요구하는 관객에 부흥할 영화를 만들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폭력', '복수', '비정함', '냉혹', '킬러', '핏빛' 등의 용어로 설명되는 하드보일드 장르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열혈관객을 위한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간 것이 아니라, 대다수 관객이 한국영화를 외면하면서 요구했던 바로 그 조건을 정확히 짚고 파고들면서 성공했다는 점이죠. 

하지만, 그건 주류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세계적으로는 태어난 지 오래된 유형이었습니다. 그건 급속히 관객의 층을 굳건히 하고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감독이 창조하고 설계한 새로운 시도는 아니었습니다. 

자!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구요. 지금 영화의 소비층은 대부분 10대 말~20대입니다. 벌써 30대만 넘어가도 괴로운 현실과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영화를 편안하게 감상하면서 즐기는 수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그럼 주 소비층인 그들이 주로 좋아하는 장르는 무엇일까요. 어느 부류가 되었든 비정하고 냉혹한 이야기에 스타일이 멋지며 감각적인 영화를 선호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상황에서 음악으로 비유하면  힙합이나 발라드 정도가 되겠죠. 힙합이나 발라드가 무조건 수준이 낮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가장 대중적이라는 것에는 반대할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주 소비층이 주로 선호하는 장르는 분명히 주 소비층이 아닌 기성 세대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바로 박찬욱은 이런 세대를 대상으로, 그들의 막강한 호응을 받으며 가장 그럴듯하고 완성도 있게 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힙합 음악을 두고 비주류라거나 언더음악이라거나 하지 않듯이, 박찬욱의 영화는 결코 비주류적이거나 B급이라거나, 컬트라거나 하는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박찬욱과 비슷한 취향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감독이 김지운입니다. 시중에선 그를 공포영화와 연결지으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컬트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의 경향을 따르는 하드고어나 슬래셔와 홍콩의 느와르 액션물이 융합된 스타일에 빠져 있는 감독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용한 가족]에서부터 최근 [달콤한 인생]에 이르기까지 박찬욱 못지않게 역시 컬트영화에 대한 동경이 가득하면서도 한편으론 주류적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감독이죠. 

그러나 [반칙왕]을 제외하고 나머지 영화들은 하나같이 기존에 널려있던 갖가지 쇼킹한 요소들을 한데 모아놓은 데 불과한 작품들이었습니다. 조합하는 재주도 재주겠죠. 그러나 그건 아류일 뿐입니다. [장화, 홍련]에서 정상인 사람이 살아도 금방 미쳐버릴 것 같은 이상한 집으로 주인공을 밀어넣고 분위기를 띄운다는 출발점부터 이미 영화는 3류적인 것에 다름없습니다. 컬트는 인위적으로 그렇게 되려고 따라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란 걸 잘 아는 김지운 감독이 그런 늪에 빠져 계속 머물러 있는 건, 컬트를 창조한 선배 영화인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아닌, 컬트를 숭배했던 관객들의 단순한 취향에만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박찬욱 감독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보니 만드는 영화마다 젊은 관객의 입맛에는 더할 나위 없이 맞는 흐름을 갖추게 되면서 돈을 버는 데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는 흥행의 귀재가 되었죠. 그렇게되면 이미 그건 주류흥행영화이지 컬트가 아니잖아요. 이미 세계화는 진행되었고 지금은 60년대 70년대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풍부하고 발전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한때 미국의 비주류 영화인들로 구성됐던 B급, 인디, 독립, 컬트와 같은 단어로 규정된 틀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고 그들은 생활 속으로, 가족 속으로 들어와 좀더 현실적인 문제와 부딪치고 부조리와 싸우고, 60, 70년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현상을 직시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투쟁하며 새로운 영화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김지운 감독을 비롯한 한국의 영화인들은 몇십 년 전 그 아류의 아류쯤 되는 감독들과 의기투합해 시대착오적인 흥행영화들을 만들면서 겉으로는 B급, 컬트인 척하고 있죠.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이나 문제의식이 없이 마치 그들이 새로운 한국영화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인 양 취급하는 언론이나 관객의 태도는 감독과 마찬가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영화의 흐름으로 볼 때, 동시대 감각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위 두 감독과는 조금 다른 장르로 관객을 파고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과 장준환 감독인데요. 먼저, 봉준호 감독을 보죠. [플란더스의 개]를 만들기 이전의 그가 공동각본을 했던 영화들은 단편, 장편을 막론하고 미안하지만 언급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그 중에 좀 유명했던 민병천 감독의 [유령]에 봉준호 감독은 장준환 감독과 더불어 각본에 참여했었는데, 과연 이런 이야기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거나 기발한 아이디어의 소유자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요? 그 영화는 그냥 미국영화 리메이크 수준 아니었습니까? 

[플란더스의 개]는 [살인의 추억]이후 주류관객들에 의해 재평가되기 시작한 영화지만, 장준환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에서 어설프게 집어넣은 시위장면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아내의 퇴직금을 뒷돈으로 대학교수가 된다는,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생뚱맞은 비판 코드를 삽입함으로써 뭔가 있어보이려 한 영화에 불과했는데, 이런 어설픈 비판은 역시 다음 작품 [살인의 추억]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살인의 추억]은 완성도만으로 보면 꽤 훌륭했고 말 그대로 웰메이드 작품이라 할 만한 영화였지만, 학생시위를 하다가 한 시골마을에 들어온 학생이라는 별 의미 없는 캐릭터를 끼워넣고 거기에 살인의 피해자가 아닌 수사를 맡은 경찰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되면서 말과 행동은 80년대의 암울했던 정치적 상황과 악몽에 가까운 인권을 반성하며 되돌아본다지만, 실제로는 범죄자들을 잡기에 급급한 형사들이 주체가 된 범죄 스릴러이며, 할리우드의 범죄영화들을 보며 자란 봉준호 감독이 한국적 상황에 맞는 소재를 찾다가 발견한 영화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박찬욱이나 김지운과는 달리 컬트 취향의 기교를 보여주는 감독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 갖기보다는 단순한 미국영화의 형식적 유려함에 심취하면서 상업성에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남극일기]에의 참여나 거대자본을 투입하는 [괴물]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 길을 선택한 이상 스필버그에 버금가는 아시아의 대표적 주류흥행감독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말 외에는 할 게 없어져버립니다.

장준환 감독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모텔 선인장]과 [유령]의 공동각본을 썼다는 점은 [지구를 지켜라] 영화만 본 사람으로서는 떠올리기 힘들거나 싫은 감독의 경력 중의 하나가 될 텐데요. 혹시나 [지구를 지켜라]를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이거 정말 참신한 물건인데 내가 오해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던 사람이라도 감독의 이런 각본 경력을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할리우드의 주류 형식과 상상에 갇혀 있던 과거의 행적을 알게 되는 순간 그런 느낌이 확 지워지지 않겠어요? 

[지구를 지켜라]가 정말 천재적인 상상력의 소유자가 만든 영화라고 한다면 안드로메다라는지, 개기월식이라든지, 노조를 탄압한 악덕 기업주라든지, 비리로 물러난 왕년의 형사라든지 뭐 그런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설정이 없거나 최소한으로 축소됐어야 합니다. 시간만 나면 재잘거리는 수많은 대사를 줄였어야 하고, 걸핏하면 집어넣는 자본주의 비판과,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하려는 인위적인 설명도 없앴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감독 개인의 광활한 우주와 외계 생명체에 대한 관심과 매력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열정 있는 영화라기보다는, 80년대 만들어진 존 세일즈의 [외계에서 온 형제]나 존 카펜터의 [스타맨], 알렉스 콕스의 [리포 맨]같은 영화들을 단순하게 한국에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80년대 초에 [지구를 지켜라]가 만들어졌다면 아마도 지금 대다수 평론가나 관객이 장준환 감독과 이 영화를 보며 칭찬하는 시각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는 2003년입니다. 거대자본을 들여 수준급 배우들을 기용해 만든 영화를 흥행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받은 걸작이라느니, 컬트라느니, B급이라 부르고 불러주길 원하는 등의 사태는 외국의 평론가가 [올드보이]를 보며 평한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 붕괴의 불길한 징후입니다.

4+1에서 +1은 5명의 감독 중 가장 때가 덜 묻은 류승완 감독입니다. 그의 영화엔 순수한 열정이 보입니다. 어설프게 잘 모르는 분야를 집어넣어서 잡다한 모습으로 관객을 호도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아라한 장풍대작전]이후부터는 그렇습니다. 그 이전의 작품들은 미안하지만 습작용에 불과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팬과 평론가들이 박수를 쳤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다찌미와 리]같은 영화들은 결코 창의적이지 못했습니다. 특히 [죽거나...]에선 마지막에 그런 음악을 쓰는 게 아닙니다. 아마 감독 자신도 지금 보면 좀 민망한 느낌을 가질 겁니다. 하긴 지나고 보면 다 그렇게 부족하고 아쉽고 그럴 겁니다. 

[아라한...]이후로 류승완은 자신의 한계를 보는 눈에 있어서 솔직해진 것 같습니다. 이소룡, 성룡, 주성치 등 여전히 너무 많은 영화인과 영화들에서 영향받은 화면으로 감독의 주관적 시각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종종 들었지만, 결국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독립된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감독의 색깔보다는 작품에 참여한 스텝들의 힘이 합쳐진 결과로 보이며, 단순히 열정만 가지고 만드는 게 아닌, 카메라라든지, 조명이라든지, 소품이라든지, CG 라든지 각 분야에서 가지를 쳐가며 가다듬는 노력을 한 덕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노와영화에서는 아직까지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 감독으로 보고 있습니다. 걸작이라 할 만한 영화를 내놓지 못했고, 최근의 작품들이 감독의 개성을 드러내는데 일정부분 한계가 있었던 작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라한...]에서 보여준 것 같은 흥미진진한 소재를 가지고 좀더 소규모의 작업이 가능하다면 이제까지 보여준 작품의 수준에서 한 단계 도약하는 영화가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는 할 수 있겠지만, 과연 류승완 감독이 다른 주류 감독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좋아하는 영화 베스트 10을 조사해보면 그 감독의 미래가 보통 보이는 법인데 류승완 감독은 어떤 영화들을 베스트로 꼽는지 궁금하네요.

사실 위의 4+1명 외에도 강제규나 강우석, 곽경택, 곽재용 같은 감독은 흥행이라면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만한 능력을 가진 진정한 주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10대말~20대가 바라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아닙니다. 거의 전세대를 아우르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 물론 굉장히 힘든 것이고 대단한 것임이 틀림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대의 대중성이지 작품의 영원성이나 예술적 가치와는 무관한 것이죠. 지금 바노와영화에서는 영원히 사는 영화와 영원히 죽는 영화, 혹은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는 경향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10년 후에도 위에 열거한 4+1 감독의 영화가 인정받고 대접받을 것인지, 그때 새롭게 등장할 10대와 20대의 관객들이 이들 영화를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받아들이게 될지 곰곰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또 10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현재까지의 저 4+1 감독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비관적입니다.

폴드망이라는 사람은 평론의 역사는 오독의 역사, 즉 잘못 평가해온 역사라고 했습니다. 당대의 환영과 칭찬에 길들여지면 질수록 실패한 영화가 되기 쉽다는 뜻입니다. 냉철하게 저 4명의 감독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내세우는 영화가 뭐가 그토록 새로운 것인지 일일이 따져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나 당대에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영화는 무엇이 있는지, 그런 감독은 누구인지 찾아보고 그들이 옳다면 응원하자는 겁니다. 


2005.6.9. 방배동 작업실에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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