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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공중부양일기: 글자나라>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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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디렉터스 작성일26-10-07 17:08 조회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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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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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 시험 기간 일요일이면 언제나 나는 도서관에 간다. 가끔 같은 반 애들도 만나지만, 다른 반이나 다른 학교 애들도 볼 수 있어서 나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공부도 더 잘된다.


아침에 일찍 들어가 창가 쪽에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으므로 다른 잡념 없이 오전 내내 공부에만 전념했다.


이상한 일은 점심을 먹고 나서 시작됐다. 마침 식당에서 만난 친구와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다 자리에 돌아왔다. 다시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에 책을 펼쳤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졸음이 밀려왔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상쾌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에 책을 치우고 책상에 엎드렸다. 자다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어서 혹시 몰라 얼굴을 창가 쪽으로 두고 최대한 웅크렸다.


그런데 막상 누우니 자세가 불편해 도무지 편치가 않았다. 자는 것도 안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옆자리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었기에 조용히 있어야 했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멍한 상태로 누워있던 중에, 한쪽에 쌓아뒀던 책이 조금씩 꿈틀대며 열리려고 하는 걸 목격했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벌떡 들었다. 확실하게 책 안에서 뭔가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벌레라 생각했다. 무척 기분이 나빴다. 눌러 죽이고 싶었지만, 책이 더러워지는 건 더 싫었으므로 기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벌레가 아닌 이상하게 생긴 녀석이 페이지 틈 사이로 비집고 나타났다. 기역(ㄱ) 모양의 글자였다. 그 글자에 눈과 입과 두 손, 두 발이 달려 있었다.

 

얇았던 몸은 책에서 나오자마자 손바닥 크기로 커졌다. 그 글자는 이상한 몸을 비비며 나를 바라봤다.


“흠흠…… 이봐! 큰 친구,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작지만 제법 크게 울리는 말투였다. 나는 할 말을 잃어 멍하니 있었다. 책에서 나온 글자가 나한테 말을 한 거였으므로.


주위를 둘러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미동이 전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시계도 사람도 모든 게 정지된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좀 더 멀리 쳐다봐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떴지만 그대로였다.


“우리가 좀 어려운 상황에 빠져서 그러네. 나랑 같이 가세.”


기역 형태의 글자는 뒷짐을 지고 책 주위를 돌며 친절하게 말했다. 걷는 폼과 말투를 봐서는 어른이었다.


“저요?”

그래, 자네처럼 좀 큰 친구가 필요해.”

“무슨 일인데요? 당신은 누구죠?”

“얘기하자면 좀 길어. 일단 나를 좀 따라오게나.”


기역은 내 손가락을 잡더니 책 속으로 데리고 가려 했다. 크기가 내 손바닥만 했으나 그 글자의 힘은 무척 셌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이 책 속으로 나를?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난 기역의 힘에 끌려 책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 버렸다.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캄캄한 공간이 잠깐 보이더니 곧 밝은 빛으로 가득한 어떤 곳에 떨어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쿵- 하는 충격이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형형색색으로 물든 꽃들로 가득한 들판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엔 기역뿐만 아니라 니은(ㄴ), 리을(ㄹ), 지읒(ㅈ) 등의 글자 모양의 생명체들이 있었다.


내가 눈을 비비며 앉아 있는 동안, 리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기역을 쳐다보며 말했다.


“음…… 인간이 아닌가? 언제부터 자네가 인간에게 의지했지?”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어.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순 없지 않나?”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니은이 말했다.


“자네 방법이 이거였나? 실망이군. 인간이란 저들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나는 이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봤네. 우릴 도와줄 거야.”


기역이 설득했지만, 니은은 뒤돌아서며 말했다.


“음, 그래도 이건 아냐. 찬성할 수 없군.”

“나를 믿게. 자,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네. 서두르세.”


기역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지읒에게 갔다. 지읒은 나머지 글자들보다 조금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으면서 묵묵히 이들의 토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보다 높은 직책으로 보였다.


기역이 지읒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스승님 최후의 수단입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지읒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저기…… 무슨 일인지 제가 알면 안 되나요?”


나는 이들의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 분명 내 이야긴데 나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만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역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망설이다 말했다.


“인질로 잡혀간 제자 피읖(ㅍ)을 구출해오는 일이야. 그 아이가 마음이 약해 적들의 고문을 이겨내지 못할 거야. 하루빨리 데려와야 하네.”

“피읖이요?”

“우리 최고의 용사인 이응(ㅇ)이 동행하게 될 걸세.”


나는 멍해졌다.


“이응은 그간 우리 전쟁에 모두 참여해 공을 세운 영웅일세. 다만 이번엔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힘을 보태주게나.”


전쟁이라니…… 공부하러 도서관에 왔다가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었다. 낮에 잠깐 잠을 자고 나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불러온 화였다. 나는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꽃밭과 푸른 초원뿐이었다. 동화 속 같은 풍경이었다.


내가 일어서자 리을과 니은은 내가 생각보다 훨씬 크게 보이는 듯 약간 놀라며 고개를 바짝 들어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지읒이 조용히 말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다른 글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침묵하자, 리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읒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우린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우선 피읖을 구출해온 뒤 그들과 협상을 해보도록 하지요. 중간에 더 큰 일이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음…… 그래, 너의 말이 옳다. 그러나 신중히 행동하라. 무리한 전술은 항상 무리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야.”


지읒의 지시에 기역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허락하시는 것으로 알고 이응을 부르겠습니다.”


지읒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낌표(!)와 물음표(?)의 시중을 받으며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거대한 책 모양의 저택으로 향했다.

 

잠시 후 기역이 하늘에 신호를 보내니 곧 멀리서 이응이 땅을 쿵쿵 울리며 뛰어왔다. 덩치가 매우 좋았다. 그래 봐야 십여 센티 크기였지만.


이응은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숨도 고르지 않고 말했다.


“결정 났소?”


목소리는 우렁찼다. 눈썹도 앵그리버드 처럼 굵어서 매우 험악해 보였다.


“그래, 여기 이 소년과 동행하거라.”


기역과 리을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이응은 됐다는 듯 한 손으로 코를 후비며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책장은 매우 크고 넓어. 우린 빨리 찾을 수 없다고.”


기역의 말에 이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알았수, 이봐, 떠나지.”


나는 얼떨결에 이응이 가자는 곳을 향해 걸었다. 뒤돌아보니 니은과 리을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기역은 그들에게 뭔가를 계속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미덥지 않아 하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는 동안 이응은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주머니에 들어 있는 콩을 자주 꺼내 먹었다.


“어디까지 가야 돼요?”

“이봐! 그냥 말 놓지. 누가 나한테 존댓말을 하면 불편해서 말이지. 그리고 난 젊어. 아까 그 양반들과는 달라.”

“그래……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잭슨 도서관. 적들의 본거지야.”

 

이응은 아무래도 내가 걷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걸 알았는지 내 다리를 기어올라 어깨에 올라탔다.


“좀 빌리자구……”


나도 싫지는 않았다. 작고 앙증맞은 것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적들의 본거지가 도서관이야?”

“그래, 아무래도 책이 가장 많은 곳이니까.”


나는 뭐 그냥 가서 보면 알겠지 싶은 생각에 더 물어보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나보다 더 큰 생명체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무서운 것도 없었다. 나는 뭐가 나타나든 다 덤벼도 얼마든지 상대해주겠다는 자신감으로 어깨를 쭉 펴고 걸었다. 왠지 장군이 된 것 같았다.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 같은 곳을 한참 걸었다.


“아! 다 왔군. 저기야.”


이응이 가리키는 곳에 하얀 5층짜리 건축물이 멀리 보였다. 가까이 갈수록 들판 한가운데 있는 웅장한 도서관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을씨년스러우면서도 불길하게 다가왔다. 사람에게 5층 높이면 이 친구들한테는 아주 큰 건물인 셈이다.


도서관 입구에 도착하자 이응은 어깨에서 내려와 분주히 도서관 주변을 살핀 후 건물 한쪽 귀퉁이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기다려봐. 도서관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밥 먹으러 가는 시간을 이용해야 하니까.”


나도 이응 옆에 앉았다. 그런데 밥 얘기를 하니까 살살 또 배가 고파졌다.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또 배고프네.”

“이거라도 먹어볼 테야? 우리하곤 입맛이 좀 다를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그가 준 콩 같은 작은 음식을 입에 넣었지만, 곧바로 옆에 뱉어버렸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역한 맛이 났다.


“툇툇! 아…… 미안해.”

“괜찮아. 인간들의 입맛은 정말 불가사의하지.”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상하게 생긴 녀석이 옆에 나타나 내가 뱉은 것을 집어 먹었다. 무슨 기호처럼 보이는 녀석이었다. 난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뭐야?”

“아…… 신경 쓰지 마. 버림받은 문자야.”

“버림받은 문자?”

“그래, 오래전에 폐기돼서 쓰임이 없어진 친구들이지. 의미가 사라졌고 발음이 없어져 말도 못 해.”


그 기호는 음식을 다 먹더니 나를 보고 뭐라고 웅얼웅얼했지만 뭐라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이응은 그 기호에게 콩 하나를 더 준 뒤 쫓아냈다. 기호는 뒤뚱뒤뚱하며 멀리 사라졌다. 좀 불쌍해 보였다.


잠시 후 건물 외벽에 걸려 있던 큰 디지털시계가 12시를 가리켰다. 도서관 창문 옆에 숨어 있는데,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곧 사라졌다.


“됐어, 녀석들이 지하로 내려갔어. 들어가자. 나만 따라와.”


나는 이응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도서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복도를 지나 책들이 많은 1호실로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움직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여긴 누가 오는 도서관이야?”

“누구긴 적들이지.”

“그 적들도 너희처럼 글자로 되어 있어?”

“아니, 놈들은 형체가 없어.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없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좀 긴장해야 했다. 이응을 따라 조심히 책장 쪽으로 들어갔다.


이응은 뭔가 장비를 꺼내고 있었다. 작은 기계를 손목에 차고 밧줄을 몸에 두르고 작은 칼도 꺼냈다.


“잘 들어. 여기서부터 우측에 있는 책장의 책을 모두 뒤져서 피읖을 찾아. 피읖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그는 어느 책 속에 갇혀 있어. 내가 이 단추를 누르면 우린 몸이 빨갛게 물들어. 그러니까 책 사이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지를 잘 살펴봐.”


이응이 손목에 찬 장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단추를 누르니 곧 그의 몸에선 정말 붉은 빛이 나타났다.


이응은 밧줄을 이용해 책장을 타고 올라갔다. 그는 나에 비하면 매우 작은 덩치이지만 날렵하고 용감했다. 어느새 내 눈높이까지 올라간 이응은 책들 사이를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따라 우측에 있는 책장을 살펴봤다.


아무리 붉은빛이 나온다 해도 수많은 책 안에 감춰져 있는 피읖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곧 요령이 생겨 한꺼번에 많은 책을 기울여가며 빠르게 움직였다.


내 속도를 보며 이응은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그가 한 권을 채 살펴보기도 전에 나는 거의 백여 권을 뒤질 정도였으니 그의 처지에선 놀랄 만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긴박하게 흐리고 있었다. 나는 거의 1호실 책장 끝까지 가 있었다. 좌측을 둘러보니 멀리서 책장들 사이로 밧줄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 작은 몸으로 부지런히 책들 사이를 오가는 이응의 능력은 꽤 대단했다.


우리는 거의 이십여 분 만에 1호실에 있는 책 전부를 훑을 수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책이었다. 하지만 피읖은 찾을 수 없었다.


“다 했으면 저쪽으로 가자.”


그곳을 빠져나와 이응이 가리키는 바로 옆 2호실로 곧장 갔다. 쉴 여유가 없었다. 2호실은 1호실보다 조금 작았다.

 

“나도 여기에 몇 호실까지 있는지는 알 수 없어.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그런데 여기에 피읖이 있다는 건 확실해?”


부지런히 뒤지는 이응을 보며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 글자 생명체는 책에서 빠져나와서는 오래 살 수가 없어. 인질로 잡혀간 피읖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면 여기 도서관 어딘가에 가뒀을 거라고.”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피읖을 찾는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다시 십여 분의 시간을 보내며 2호실도 모두 찾아봤지만 역시 피읖은 없었다. 우린 조금씩 지쳐갔다. 하지만 이응은 바로 다시 옆방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곳은 좀 큰 참고용 도서들이 주로 있는 자료실이었다. 책이 크고 무거워 찾기는 더욱더 어려웠다. 그래도 이응은 재빠르게 밧줄에 매달려 부지런히 책들을 뒤졌다.


그때 책장 끝에서 붉은빛이 보였다.

 

“앗! 저기야!”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나는 희미한 불빛을 따라가 드디어 빛이 새어 나오는 책을 찾아냈다. 조심스럽게 그 안을 열어보니 피읖 모양의 생명체가 쿨쿨 코를 졸며 자고 있었다.


어느새 내 어깨로 올라와서 피읖을 본 이응이 말했다.


“흐음…… 이 녀석한테 약물을 투입했군.”


이응은 곧바로 피읖을 미리 준비해 온 가방에 옮겨 등에 메고 나와 같이 자료실 문 쪽으로 갔다.


그 순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놈들이 벌써 들어왔어.”


이응과 나는 급히 근처 책상 밑으로 숨었다. 밖에서 에이(A), 비(B), 씨(C), 디(D), 이(E) 등 몇 명의 알파벳들이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속삭이듯 이응에게 물었다.


“저것들은 뭐야?”

“적들의 명령을 받아 도서관을 지키는 문자들이야. 우리와는 다르게 아주 포악하지.”


포악하다는 말에 나는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크기가 커봐야 손바닥만 한 것들인데 사나우면 얼마나 사나울까 싶었다.


“내가 처리할까? 나한텐 그냥 우습게 보이거든.”


내 표정을 보며 망설이던 이응이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시간을 좀 끌어줘. 그동안 난 피읖을 데리고 빠져나갈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막 나가려던 이응은 내가 걱정됐는지 뒤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봐, 조심하라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여유를 부리며 책상 아래에서 나왔다. 옷을 털고는 알파벳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서서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일제히 올려다봤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피식하고 한번 웃어주었다.

 

그때 알파벳들이 등에서 나온 날개를 이용해 공중을 날며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갑자기 주사기에 찔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앞과 뒤 사방에서 알파벳들이 바늘처럼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공격을 해왔다.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동안 이응은 피읖을 둘러업고 자료실을 빠져 달아났다.


이응이 나가는 것을 본 나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얇은 책을 하나 꺼내 들어 마구 휘둘렀다. 그러나 알파벳들은 책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가도 금세 다시 일어나 날아다녔다. 삐죽삐죽한 바늘을 든 알파벳들이 눈앞을 쉴 새 없이 날아다녀 나는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저 바늘에 눈이라도 찔리면 큰일이었다.


그때 비상벨이 울리며 각 호실과 복도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자료실을 나가 복도를 내달렸다. 이응이 저 앞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바로 앞에 벽이 생겨나면서 차단되자 이응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잠복하던 알파벳 녀석들과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도서관 내부의 모든 문이 차단되면서 우린 갇힐 것만 같았다. 불안해졌다.


나는 눈앞을 휙휙 날아다니는 드는 녀석들을 물리치느라 이응과 피읖을 도와줄 수 없었다. 그때 멀리 이응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도 재빠르게 뒤따라 화장실로 들어간 뒤 문을 걸어 잠갔다.


“창문을 부숴!”

“뭐? 하지만 여긴 3층이야.”

“걱정하지 마, 녀석 중 하나를 잡아 왔어.”


이응은 큰 가방 안에 묶여 있는 에이치(H)를 보여줬다. 에이치는 입에 붙인 테이프 때문에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이응이 화장실 바닥에 물을 뿌리고 문 옆 벽걸이에 물바가지를 얹어놓는 동안 나는 바로 창문을 깼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 봤다. 아찔했다.


“알파벳들은 절대로 자살을 하지 않아. 그러니 이 녀석을 안고 뛰어내리면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할 거야. 이 녀석들 날개는 아주 힘이 좋거든. 자, 시도해보자.”


밖에서는 쫓아온 알파벳들이 화장실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응은 한 손으로 피읖이 들어가 있는 가방을 들고, 등에는 에이치가 잡혀 있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언뜻 봐도 꽤 힘들 것 같았다. 나는 알파벳들이 화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찰나 이응과 손을 잡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화장실로 들어온 알파벳들이 물바가지를 뒤집어쓰면서 미끄러운 바닥에 나뒹구는 등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우린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공중에 떠 있었다. 에이치 이 녀석이 아주 죽을힘을 다해 날갯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힘에 부치는지 우린 서서히 땅으로 내려갔다. 잭슨 도서관 밖 뜰에 내려앉자 에이치는 숨을 헐떡이며 드러누웠다. 나는 뒤쫓아 올 알파벳들을 피하고자 되도록 멀리 달아났다. 그런데 이응은 에이치를 풀어주고는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걸어왔다.


“괜찮아, 녀석들은 도서관 밖으로는 쉽게 나오지 못해.”


깨진 화장실 창문을 올려다보니 밖으로 날갯짓하며 나왔다 다시 들어갔다 반복하는 알파벳들을 볼 수 있었다. 나올까 말까 망설이는 듯했는데, 표정은 하나같이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왜 밖으로는 못 나오지?”

“한번 잘못 나오면 다시 못 들어갈 수도 있거든. 포악한 주인은 저놈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아. 그냥 버리지.”

“버리면 어떻게 돼?”

“어떻게 되긴, 그냥 죽는 거지.”


간신히 피읖을 구출해 도서관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우리는 지쳐서 풀밭에 드러누워 잠이 들어버린 에이치를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번에도 역시 이응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와 앉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피읖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알고 보니 피읖은 여자였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 질질 흐르던 침을 닦고 있었다. 내가 피읖이 여자라는 게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이응이 말했다.


“잡혀 있는 동안 화장을 못 해서 사내 아이처럼 보였던 거야.”


잠에서 깬 피읖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보고는 처음엔 놀라며 경계했지만, 곧 익숙해졌는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곤 아직 약물 탓인지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잠들어버렸다.


“차라리 자는 게 나아. 깨어 있으면서 체력이 약해졌을 때는 빨리 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


나는 도서관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는 좀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이쪽으로 가면 되는 거 맞아?”

“길이 달라졌어.”

“길이?”

“음…… 적들이 지형을 바꾼 거야.”


이응은 침착하게 손목에 찬 장치를 이용해 최대한 안전하고 빠른 길을 찾아 나갔다. 그 장치에서 나온 빛을 하늘에 비추면 하늘에서 바로 빛이 반사되어 내려와 우리가 갈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우르릉 쾅쾅- 소리와 함께 먼 하늘 저쪽에서 먹구름이 우리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소나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곧 번개와 천둥이 치며 비바람이 몰아쳐 앞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간신히 근처에 있는 큰 동굴을 발견해 들어갔다.


“갑자기 웬 비야. 어떻게 하지? 우산 없어?”

“우산 따위론 소용없어. 기다려봐.”


일단 동굴에 들어가 쉬면서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이응이 동굴 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불을 피우는 동안 잠에서 깬 피읖은 추운 듯 몸을 움츠리며 동굴 안쪽 캄캄한 곳을 불안하게 쳐다보다가 다시 스르륵 잠들었다. 동굴의 안쪽은 꽤 깊어 보였고 내가 봐도 뭔가가 당장 튀어나올 같은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곳에서 깜박이는 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응이 그곳을 향해 불을 비추자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가 있는 괴상한 문자들이 벽을 타고 슬금슬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자 형태였다.

 

“뭐야 이것들은 또.”


이응은 재빨리 막대기에 불을 붙여 한자들을 쫓았다. 이어서 나한테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이 문자들은 불에 약해. 불에서 멀리 떨어지지 마. 대신 독침을 쏘지.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이때 한자 무리 중 한 명이 매우 야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게 누구신가. 건방진 이응이 아닌가.”


이응은 그를 무시했다. 대신 동굴 밖을 살폈다. 다행히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지읒 선생께서는 안녕하신가?”

“덕분에 건강히 계시지.”

“오호 그래…… 한번 봬야 하는데……”


그의 긁는 소리에도 이응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언제 정식으로 한번 초대를 하지.”

“그래야지…… 그땐 우리한테 진 빚도 갚아야겠지.”


둘이 불안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한자 문자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컴컴한 동굴 안에서 하나씩 나타나더니 어느새 서른 명도 더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손에 독침을 쏠 수 있는 활을 들고 있었다.


“으흠…… 그런데 말이야. 난 네가 좀 싫어.”


그가 이응에게 그 말을 하고 뒤로 빠지자 동굴 안쪽에서 무섭게 생긴 개가 으르렁거리며 나타났다. 이빨이 다른 개들보다 두 배는 길고 날카로워 보였다.


이응은 한자 문자들의 접근을 앞에서 막고 있으면서 서서히 다가오는 개도 경계했다. 그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입구를 향해 뛰라는 눈짓을 보냈다.


“싫으면 다시 안 보면 되겠군.”


그 순간, 나는 피읖을 안고 동굴 입구를 향해 뛰었다. 이응도 곧 뒤쫓아 왔다.


이응이 횃불을 흔들며 개의 접근을 막는 사이 한자들이 쫓아와 독침을 쏘아댔다. 나는 맞지 않았지만, 이응은 다리에 한 대를 맞고 말았다. 그는 절뚝거리며 나보다 한참 뒤처졌다. 나는 황급히 되돌아가 그를 어깨에 올려놓고 다시 뛰었다. 뒤에서 개가 쫓아오는 게 보였다.

 

그 와중에 다시 잠에서 깨 내 어깨 옷자락을 꽉 쥐고 있던 피읖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사실 무서움 타기로는 내가 더했다. 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있는 힘을 다해 뛰기만 했다.


동굴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니 개는 더 쫓아오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숨을 진정시키며 주저앉았다.


“저 개도 동굴 밖으로 나왔다가 빨리 돌아가지 못하면 주인한테 버림을 받는 거야?”

“그게 아니고 네가 워낙 빨랐어.”

“난 빠르지 않아. 100미터를 겨우 15초에 뛰는데.”

“우리한테는 굉장히 빠른 속도야. 놀라울 만큼. 우리 세계에서는 개도 그렇게 빨리 뛰지는 못해.”


내가 그렇게 빨리 뛰었나 라는 생각에 괜히 우쭐해졌다. 도움이 되었다니 좀 힘들었지만 기뻤다.


그렇지만 동굴로부터 피해 다시 황량한 들판에 나왔을 때 슬슬 독침을 맞은 이응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이응은 벌써 침을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붕대를 맨 뒤였다.


“한두 번 맞아본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 우린 인간과는 다르다고.”


한참을 다시 걸었다. 여긴 어디쯤일까. 사방을 둘러봐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그런 꽃으로 가득한 녹색 들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길이 뒤죽박죽된 게 틀림없었다. 그때 내 어깨에 이응과 같이 앉아 있던 피읖이 말했다.


“이제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아.”


이응은 반가운 듯 피읖에게 물과 콩을 열심히 주었다. 피읖은 그걸 다 받아먹었다.


“아까 그렇게 소릴 질렀으니 힘이 다 빠졌을 텐데……”


내가 친해지려고 농담을 했는데 피읖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럼 너의 치마 힘 좀 빌려볼까?”


이응은 피읖이 입고 있는 치마를 가리켰다. 피읖은 입고 있던 치마를 들어 올려 넓게 피며 말했다.


“이게…… 될지 모르겠어.”


나는 그게 뭔지 궁금했다. 피읖은 똑바로 서서 끄응- 하며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조금씩 치마가 부풀어 올랐다. 피읖을 땅에 내려줬다. 피읖의 치마는 조금씩 더 커졌다. 그리고는 마침내 공중에 뜨기 시작했다. 치마가 풍선처럼 된 것이다.

 

“된다!”


그것은 점점 커져서 어느새 나보다도 더 커졌다. 지름이 3미터 또는 4미터는 더 돼 보였다. 나는 이응과 함께 치마에 올라타고 피읖의 손을 잡았다. 치마 풍선은 어찌나 튼튼한지 내 무게를 훌륭하게 버텨주었다.

 

우린 어느덧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멀리 산과 강과 초원이 보였다. 동물들이 뛰노는 모습도 보였다.

 

“저기다!”


피읖이 소리쳤다. 자기들이 사는 마을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도 멀리 아담하고 깨끗한 마을을 보니 반가웠다. 손을 마구 저어서 그 방향으로 움직여 나갔다.


그때 다시 멀리서 먹구름이 다가왔다. 빨리 가지 않으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먹구름과 먼저 만날 상황이었다. 하지만, 치마 풍선은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다. 나는 조급해져서 팔을 더 세차게 휘저었다.


피읖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이응은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손목에 찬 장치로 햇볕을 반사해 마을에 비추고 있었다. 빛은 마치 레이저처럼 곧게 뻗어 마을의 특정한 곳을 계속 비추었다.

 

그러는 사이 먹구름은 천둥소리를 내며 거의 우리 근처까지 다가왔다. 치마 곳곳에 번개가 내리치며 구멍이 나기 시작하자 피읖은 치마 풍선의 크기를 줄이며 착륙을 시도했다. 땅에 거의 다다를 무렵 번개가 우리 주변 곳곳에 내리쳤다. 꽤 위험했다.


내 발이 땅에 닿자 나는 피읖과 이응을 꼭 안고 마구 뛰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는 굉장히 빠르다고 하니 자신감이 있었다. 방향을 알았으니 무조건 뛰면 되는 거였다. 이응은 그 순간까지도 손목 장치의 방향을 마을에 맞추어 빛을 마을 쪽으로 반사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구름은 점점 어떤 형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실제로 구름은 인간의 얼굴처럼 바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인자한 할아버지의 얼굴이었지만 가끔 눈썹이 치켜 올라갈 때면 그곳에서 하늘이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내리쳤다.

 

마을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쿵쿵 소리에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내 옆으로 마치 폭탄이 터지듯 번개가 땅에 내리꽂히기도 했고 주먹 크기의 우박도 쏟아졌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을을 향해 뛰는 것뿐이었다.


그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계속 빛으로 신호를 받던 마을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내가 앞으로 나가는 걸 방해했지만 그리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반대로 번개를 내리치고 우박을 쏟아내던 먹구름은 꽤 당황한 것 같았다. 먹구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마을 쪽에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곧게 뻗고 눈을 감고 있는 지읒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옆에 기역과 니은, 리을이 서 있었다. 바람은 그들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비와 우박은 모두 바람에 밀려 우리의 뒤쪽으로 떨어졌다. 내리치던 번개 역시 땅에 도착하기 전에 사그라졌다. 먹구름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강한 바람의 도움으로 우린 무사히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둘러싸인 곳 같았다. 분노를 머금은 채 찡그리는 인간의 얼굴을 하던 먹구름은 점점 마을에서 멀어졌고 곧 하늘은 다시 파랗게 걷혔다.


마을에 도착한 뒤 나는 바닥에 앉아 한 나무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마중 나온 기역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안전한 것이 확인되자 지읒은 두 손을 내리고 천천히 우리에게 걸어왔다. 그의 시선은 특히 나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최대한 그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몸을 더 낮추었다.


“이번엔 운이 좋아 모면했을 뿐이야. 앞으론 자네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응과 피읖의 어깨를 툭 쳐주며 격려하고는 역시 느낌표와 물음표의 수행을 받으며 책 모양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엄숙해 있던 상황에서 기역이 피읖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으니 다들 웃음이 터졌다.

 

이응이 모든 게 잘 해결되어 뿌듯하다는 듯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난 집에 가서 좀 씻고 빨리 책으로 들어가야겠수.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 다음에 봅시다.”

“수고했네. 역시 자네뿐이야.”


기역이 그를 칭찬했다.


장비를 챙기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이응을 다들 마중했다. 이응은 정말 영웅 소리를 들을 만큼 믿음직스러운 친구였다.


리을이 말했다.


“앞으로 더 큰 일이 남아 있어. 적들의 무력행사에 우리도 힘으로 대응했으니, 앞으로 그들과의 관계는 더욱 어려워질 거야.”

“어떻게든 협상으로 풀어야겠지. 그렇게 되려면 우리 나름의 기준과 의지력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네.”


기역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나를 잠시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한마디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저는 이제 어떻게 하나요?”


기역이 내 옆으로 오며 말했다.


“오! 그래……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겠네. 같이 가지.”


나는 무표정한 니은, 지적인 리을, 그리고 예쁜척하며 무릎을 굽히는 피읖과 작별의 인사를 했다.


그냥 그렇게 헤어지자니 좀 섭섭했지만 돌아가자고 할 때 얼른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다가 원래 세상으로 못 돌아가면 나만 손해였으니까.


“다들 안녕히……”


나는 기역을 따라 어디론가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마을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점점 작아지는 원통을 통해 그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이곳에 처음 올 때처럼 컴컴한 곳을 지나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좀 기다려보니 거긴 엎드려 자려고 했던 도서관의 그 책상 앞이었다. 기역은 아무 말 없이 나에게 손을 흔들더니 다시 책으로 들어갔다.


눈을 비비며 찡그리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간은 다시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공부하고 있었다.

 

기역이 들어간 책의 페이지를 열어보았다. 평범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정확히 어떤 페이지로 들어간 건지 알 수도 없었다. 어차피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깨도 쑤시고 허리도 아프고 허벅지도 근육이 뭉친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겪은 모험이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몸은 무겁고 피곤했다.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갔다.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은 뒤 복도로 나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그 이상한 글자들의 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득 하늘 전체를 덮고 비를 뿌리고 있는 먹구름 사이로 마치 어떤 사람의 인자한 얼굴이 보일 것만 같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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